연말에서 연초로 넘어올 때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음악을 들었었다. 보통은 성실하게 듣겠다는 마음으로 한 해가 시작할 때부터 음원을 구해놓고는 하지만 (게으름을 포함하는)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먹은 만큼 듣지를 못하고는 한다. 그러다보니 해를 넘길 때가 되면 듣지 못한/않은 상당량의 음원이 저장장치에 쌓여있게 되고, 그 결과 연말에 의지를 갖고 접하는 음악들은 듣겠다고 구해놓고선 그러지를 못해서 몰아치듯 듣는 음악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부끄럽지만 대략 한 달 반전의 연말연초에도 어김없이 그랬는데, 이를테면 브래드 멜다우의 [10 Years Solo Live](Nonesuch, 2016)와 앤드류 시릴 쿼텟의 [The Declaration of Musical Independence](ECM, 2016) 등이 그렇게 듣게 된 음악들이었다. 그러나 연말연초에 들었던 음악 리스트가 듣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해 급하게 접했던 것으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다. 이 또한 연말연초라는 시기와 관계가 있는 것인데, 이 맘 때는 듣지 못했던 새로운 음악을 밀린 숙제를 하듯 들어내야 한다는 생각도 있지만 친숙한 것이기에 나름대로 의미부여를 할 수 있는 음악을 듣는 것으로도 시간을 넘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주세페 시노폴리와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가 여러 음악가들과 함께 연주한 [SchoenbergㆍBergㆍWebern](Teldec, 2008)과 사이먼 래틀과 베를리너 필하모니커가 여러 성악가들과 함께 연주하여 작년 초에 나온 베토벤 [교향곡 전집](Berliner Philharmoniker, 2016)에 수록된 [교향곡 9번]이 그렇게 듣게 된 음악의 하나였다.


나의 경우, 연말연초에 음악을 들을 때면 익숙한 음악보다는 처음 듣는 작품이나 연주에 더 많은 신경을 쓰고는 한다. 들어 본 것이 아니기에 조금 더 집중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게 되는 것도 있고 뒤늦게 듣는 음악 중에 좋은 작품이 있다면 해를 넘기기 전에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그러나 지난 연말연초에 음악을 들을 때는 이미 여러 번 접했던 음악에, 더 정확하게는 베토벤 [교향곡 9번]에 여느 때보다 더 마음을 주면서 나름의 염원을 담아 음악을 들었던 것 같다. 처음들은 음악이나 연주에서 훌륭한 작품을 만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위에 이야기한 브래드 멜다우의 [10 Years Solo Live]을 포함하는 몇 개의 앨범에는, 비록 몰아치듯이 듣는 것일지언정, 나로 하여금 해당 음악을 접하는 것에 관한 행복을 느끼게 해준 음악이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다른 새로운 음악이 아닌 베토벤 [교향곡 9번]이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익숙한 음악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음악에 마음이 많이 갔고 나름의 염원을 담기도 했던 것이다.


좋아하는 음악 장르에 클래식음악이 있는 사람에게 베토벤 [교향곡 9번]은 (누구의 연주를 떠올리는가의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연말연초에 가장 많이 떠올리게 되는 음악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은 이 기간에 연주회를 갖는 교향악단이 자주 연주하는 음악의 하나이다. 무엇보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의미에서 연주하기에 가장 좋은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베토벤 음악을 받아들이는 일반화된 내러티브라 할 수 있는 것, 곧 '고난과 역경을 넘어 환희의 세계에 도달 한다'는 내러티브로 그의 음악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교향곡 9번]을 연말연초에 연주하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고난과 역경을 넘어 환희의 세계에 도달 한다'는 베토벤 음악의 내러티브에 관해 "일반화된"이라는 표현을 붙인 이유는, 한편으로는 베토벤 음악이 연주되고 수용되는 '관습적'인 측면을 언급하기 위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베토벤 [교향곡 9번]에 관한 논의 중에는 이 음악의 형식적인 측면을 들어 저 "일반화된" 내러티브와는 다른 관점으로 이야기하는 논의가 있어왔다는 것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는 [교향곡 9번]의 세계를 보편적 휴머니즘에 기반 하여 '고난과 역경을 넘어 환희의 세계로 들어가'는 내러티브로 받아들이기에는 이 음악의 형식적인 측면에 있어 어떤 파열과 과잉의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베토벤. 음악의 철학: 단편들과 텍스트](문병호ㆍ김방현 옮김, 세창출판사, 2014)에서 베토벤 음악의 '후기 스타일'에서 드러나는 독특한 파열의 순간을 이야기 한 적이 있지만(그리고 아도르노의 이러한 작업은 이후에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장호연 옮김, 마티, 2012)에서의 비평 작업으로 이어진다), 이미 베토벤의 동시대에 [교향곡 9번]을 휴머니즘에의 열망과는 다른 방향에서 받아들인 청중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음악학자 니콜라스 쿡은 [Beethoven: Symphony No. 9](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에서 [교향곡 9번]과 연관이 있다고 흔히 이야기되는 휴머니즘과 통합으로의 열망에 관하여 의미있는 문제제기를 한 적이 있으며, 여기에 더하여 지젝은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박정수 옮김, 그린비, 2009)의 한 챕터에서 [교향곡 9번]을 보편적 인류애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논의들을 쿡 등의 연구에 기반 하여 비판적으로 살펴보면서 [교향곡 9번]에 관한 자신의 논의를 유럽연합에 관한 비판으로 이어가고 있기도 하다). "오 벗들이여, 이런 노래는 이제 그만! 그러는 대신 즐겁고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르도록 하자"라는 바리톤의 독창으로 시작하는 저 4악장의 노래를 듣는 순간은, 아프고 괴로웠던 날들을 "즐겁고 기쁨에 찬 노래"를 들으며 떠나보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에 필요한 활력을 얻을 수 있는 순간으로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베토벤 [교향곡 9번]에서 활력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음악적인 이유가, 이 음악을 듣는 시간을 기쁨이 가득한 순간으로 만들기보다는 지나온 날의 고통과 괴로움을 떠올리는 시간으로 만들어 [교향곡 9번]이 아닌 다른 음악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들으며 곡에 담겨 있는 유토피아 열망에 온전히 몸과 마음을 맡길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삶이겠지만, 개인적인 이유로든 사회적인 이유로든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2014년에는, 적어도 '4월 16일' 이후로는, 이날 이후의 2014년을 통과하는 내내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듣는 것이 심정적으로 쉽지 않았고 연말연초의 시기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은 나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어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듣는 게 마음에 걸린다"거나 "베토벤 [교향곡 9번]으로 새해를 맞이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다른 사람의 글을 보기도 했었다. 유토피아 열망이 담겨 있는 음악을 듣는 데에는 (그것이 개인적인 이유에서든 사회적인 이유에서든) 지금 상황이 고통스럽기에 미래에는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절실한 마음이 작용하고는 하지만, 2014년(의 특정 순간)은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은 해로 느낀 사람들이 있었고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듣는 것이 아니었더라도 적지 않은 사람이 그랬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2016년에서 2017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나는 예전과는 조금은 다른 심정으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들을 수 있었다. 2017년이 된다고 갑자기 삶의 조건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므로 다가올 미래를 온전히 낙관하게 되었을 리 없지만, 음악에 담겨 있는 유토피아 열망을 조금은 느껴가면서 들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은 2016년 연말에 있었던 정치사회적인 상황과 관계가 있다. 아직 여러 일들이 진행 중이고 쟁점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기에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삶의 방향이 항상 최악으로만 향하는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달아가며 음악을 들은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매주 토요일마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전국 곳곳)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하여 여러 구호와 함께 "세월호를 인양하라"는 구호를 많은 사람들과 외쳤을 때, 나는 이 구호를 외치고 난 이후에도 "이제 지겨우니까 세월호 소리 좀 그만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다는 상황에 울컥한 심정이 되고는 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노래의 정해진 후렴구처럼 반드시 들려오고는 했던 저 끔찍한 소리를, 말 그대로 들려오면 안 되는 저 소리를, 특정한 시공간에서 열린 집회에 한정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들을 수 없었다는 것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물론, 진행되고 있는 사안을 두고 무언가를 확정하고자 하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고 또한 '4ㆍ16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여러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므로, 상황이 달라지면 "이제 지겨우니까 세월호 소리 좀 그만해"라는 소리를 언제든 다시 듣게 될 가능성이 존재함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세월호를 인양하라"는 구호가 나오고 난 다음, '4ㆍ16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사안을 지나간 역사로 만들려한다거나 아예 거론조차 못하게 하려는 소리를 어떤 순간에는 듣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을, 나는 꼭 기억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기억하고 싶은 순간에 다른 하나를 덧붙여야 할 필요를 느끼기도 했다. 앞에서 나는 특정한 끔찍한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이야기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세월호를 인양하라"는 소리도 들려오면 안 되는 것이었음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두 말할 것 없이 '4ㆍ16 세월호 참사'는 일어나면 안 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고 제대로 된 조사와 보상에 기반 한 (국가의) 적절한 대응이 있었다면 사건이 발생한 후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세월호를 인양하라"는 구호를 외쳤을 리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월호를 인양하라"는 구호가 2014년 4월 16일 이후로부터 지금에 와서도 들려오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소리를 외치고 듣게 만드는 시공간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시공간에서, "세월호를 인양하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은 필요한 행위이며 (적어도 유가족과 미습수자 가족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조치가 취해지기 전까지는) "세월호를 인양하라"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구호는 중단 없이 들려야 하는 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더 좋은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면, "세월호를 인양하라"는, 2014년 4월 16일 이후로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음을 알리기 위해 외쳐지고 있는 저 참담한 구호를, 더 이상 외치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 연말연초에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들으면서 나는, 어떤 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오면 정말 좋겠다는 소망을 품었었다. 그러니까 도저히 참고 듣기 어려운 끔직한 소리는 물론이거니와 지금으로서는 마땅히 필요한 소리이지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과정을 거친 후에는 더 이상 울리지 않아도 되는 소리, 이 모두를 듣지 않을 수 있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던 것이다. 그래서이지만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들으면서 예전에는 하지 않았던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교향곡 9번] 4악장에서 바리톤의 노래로 시작을 알리는 "오 벗들이여, 이런 노래는 이제 그만! 그러는 대신 즐겁고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르도록 하자"라는 가사에서 "이런 노래는 이제 그만!"이라는 가사를, "즐겁고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먼저 (특정한) 중단이 선행되어야함을 노래하는 가사로 생각해보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교향곡 9번] 4악장에 담겨 있는 가사의 내용이나 음악 구조의 형식적인 논리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최근 한국사회의 상황에서 받은 전적인 영향 아래서 생각해 보는 것이기에, 작품에 비추어 볼 때에는 적절하지 않은 생각일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2017년의 한국이라는 시공간은, 우리에게 필요한 "이제 그만!"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듣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드는 시공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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