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것들.

살기 2016.06.26 17:48

Shigeru Umebayashi, [Yumeji's Theme], Gidon Kremer & Kremerata Baltica, 2015


ㅡ 아직 6개월 정도의 날들이 남았지만(그러나 이 올해의 남은 날들도 결국에는 쏜살같이 지나갈 것이다), 연말이 되어 올해의 앨범 베스트 10을 뽑는다면, 나는 존 콜트레인의 [Offering ㅡ Live At Temple University](Resonance Records/impulse!, 2014. 앞으로는 [Offering]으로 통칭한다)를 반드시 집어넣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물론 상반기에 나를 기쁘게 만들어 주었던 다른 좋은 앨범들도 있다. 이를테면, 현존하는 최고의 현대(클래식)음악 연주 단체의 하나인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의 [BartókㆍLigeti](α, 2016)와 도이치 그라모폰으로 옮긴 이후 피아노 독주 앨범과 영상물을 차례로 내고 있는 그리고리 소콜로프의 [SchubertㆍBeethoven](DG, 2016) 같은 앨범들, 또는 중동 음악과 재즈의 훌륭한 결합으로 기억될 아미르 엘사파의 [Crisis](Pi Recordings, 2015)와 일본의 탁월한 재즈 음악가들 가운데서도 나에게는 사카타 아키라와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인 키구치 마사부미의 유작 [Black Orpheus](ECM, 2016) 같은 앨범들, 또는 탁월한 피아니스트이자 가수로서 최고의 브라질 음악을 선사해준 엘리아니 엘리아스의 [Made In Brazil](Concord Jazz, 2015)과 [Have One on Me](Drag City, 2010)를 추천해준 친구를 통해 뒤늦게 듣게 되었지만 이제는 말 그대로 팬이 되어버린 조애너 뉴섬의 [Divers](Drag City, 2015) 같은 앨범들. 그러니까 올 상반기에도 다른 해와 마찬가지로 좋은 음악을 들려준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은 다른 앨범들을 포함하는) 여러 앨범들이 분명히 내 곁에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굳이 콜트레인의 [Offering]을 따로 언급하는 것은 이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 느꼈던 감정이 다른 앨범들을 들었을 때보다 더욱 강렬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2014년에 임펄스에서 앨범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제대로 된 실체가 알려지지 않았던 이 실황 녹음을, 나는 뜨거움과 비통함의 감정을 오고가며 듣고는 했고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긴 시간 그럴 것이다. 사실 나는,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 부으며 곡의 원형을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확장해가는 [Naima]를 시작으로 콜트레인의 가장 유명한 앨범의 하나이자 연주곡이기도 한 [My Favorite Things](그러나 1961년에 애틀란틱에서 나온 앨범에 수록된 연주와는 너무나도 다른 연주)로 끝나는 이 앨범을 들으며, [Love Supreme](impulse!, 1964) 이후의 콜트레인이 이른바 "New Thing"이라 불렀던 그의 아방가르드 재즈 스타일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여러 생각거리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Offering]을 처음 들었을 때 가장 충격을 받았던 부분은 콜트레인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생각의 재료를 얻었다는 것보다는 정서적인 충격에 기인한 것이 더 크게 작용한 것과 관계가 있는데,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이 그랬지만 특히나 [Leo]를 들었을 때의 느낌을 지금도 잊기 어렵다.


나에게는 드러머 래시드 알리와 함께한(알리는 [Offering]에도 드러머로 참여했다) 콜트레인의 (스튜디오) 유작인 [Interstellar Space](impulse!, 1967)와 일본에서의 라이브를 담은 앨범인 [Live in Japan](impulse!, 1991)에 수록된 곡으로 기억되고 있는 [Leo]에서, 콜트레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극도로 몰입한 종교적인 의식의 한복판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한다. 알리의 광폭한 드럼 연주가 함께하는 가운데(물론 다른 음악가들도 함께 하고 있지만, 이 곡에서 알리의 드럼 연주는 팀원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느껴지고는 한다) 들려오는 콜트레인의 색소폰은 비명을 지르고 악기를 연주하지 않을 때 콜트레인은 의미 불명의 노래를 육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때 들려오는 비명의 악기 사운드와 의미 불명의 노래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앨범 북클릿에 수록된 애슐리 칸(그는 [A Love Supreme: The Story of John Coltrane's Signature Album](Penguin Books, 2003)의 저자이며 2002년에 임펄스에서 나온 [A Love Supreme] 디럭스 에디션에 라이너 노트를 쓰기도 했다)의 라이너 노트에 따르면, [Offering]에서의 콜트레인의 노래는 아무 생각 없이 내지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당시에 탐구하던 동양사상이 반영되기도 했으며 또한 특정한 음악적 효과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칸은 [Offering]의 북클릿에서 콜트레인의 노래를 'The Voice'라는 항목을 만들어 따로 분석하고 있기도 하다. 이 앨범에 수록된 글에서 칸은 [Offering]이라는 앨범을 몇 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는데 분석의 직접적인 대상인 [Offering]뿐만 아니라 콜트레인의 후기 음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도움이 되는 글이다).


아마도 칸의 말이 맞을 것이다. 음악을 연주하는 시간이 그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 일종의 종교적 몰입의 시간처럼 다가온다는 것은 단순한 열광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것처럼, 1960년대 이후에 나온 콜트레인의 음악에는 당시에 그가 탐구하고 있었던 (특히 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양사상의 흔적이 담겨 있고는 했으며 그의 육성을 들을 수 있는 앨범이 [Offering]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후반기 음악에서 종종 들리고는 했던 4도 화음은 콜트레인이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탐구했던 인도사상과 연관된 것으로 이야기되고는 했고 [A Love Supreme]의 [Part 1 ㅡ Acknowledgement]의 후반부에서는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강렬함에 있어서는 [Offering]이 조금 더 강도 높게 다가오는 것 같다. [Offering]을 듣고 있으면 처음부터 미친 듯이 불타오르다가도 [Leo]에서의 연주와 노래를 기점으로 점점 더 비통한 감정에 빠져 들어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한다. 더할 수 없이 뜨거운 앨범을 들으면서도 왜 나는 슬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이 앨범에 담겨 있는 라이브를 끝낸 후 채 1년이 되지 않아 콜트레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전기적 사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 콜트레인의 [Offering]을, 이 앨범에 수록된 곡 중에서도 특히나 [Leo]를 들을 때마다, 계속해서 뒤흔들리는 경험을 하고 있다.


ㅡ 영화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다루는 방식에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사랑을 다루는 모든 영화 안에 저마다의 독특한 방식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감독의 영화는 다름 아닌 그 감독의 영화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는 한다. 아마도 왕가위와 그의 영화는 그런 대상의 하나일 것이다. 이를테면, 실연당한 633(양조위)을 보여주는 몇몇 장면들이나 페이(왕페이)가 633의 집에 지속적으로 방문하는 장면을 통해 사랑에 관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중경삼림](1994)을 보면서 왕가위 이외의 다른 감독을 떠올리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내가 약간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화양연화](2000)도 그런 영화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두고 감독 자신이 "제2의 데뷔작"으로 부르기도 했지만 감독의 저 표현이 아니더라도 [화양연화]를 보고 있으면 이 영화는 '다름 아닌 왕가위의 영화'로 다가올 수밖에 없게 된다.


[화양연화]를 다시 볼 때마다 언젠가부터 뭉클한 마음으로 보게 되는 장면이 있다. 내가 자주 쓰는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다른 사람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에게만은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장면. 물론 [화양연화]에는 기억에 남을 장면이 여럿 있고 이 영화를 인상적으로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장면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나도 마찬가지여서 [화양연화]의 장면을 두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하나의 장면이 아닌 복수의 장면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단 한 장면에 관한 약간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오랜만에 왕가위 영화 몇 편을 다시 보았는데 [화양연화]에서는 역시나 다른 장면들보다도 그 장면이 눈에 더 밟혔기 때문이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장면은 영화의 절반 가까운 지점에 있는 것이다. 집주인인 수엔 부인이 늦게 들어오는 줄 알았던 초우모완(양조위)이 자신의 집으로 수리첸(장만옥)을 초대했다가 예상과는 다르게 수엔 부인이 일찍 집에 와서는 응접실에서 밤새도록 친구들과 마작을 하고, 그 결과 수리첸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어 초우모완의 집에서 어쩔 수 없이 밤을 보내는 시퀀스에 들어 있는 장면. 이 시퀀스는 밤샘 마작을 하는 수엔 부인과 친구들 그리고 이들 때문에 본의 아니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초우모완과 수리첸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는 것으로 진행되는데, 이 시퀀스의 초반부에는 마작 모임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신문에 연재할 무협소설을 쓰는 초우모완과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수리첸을 수평 이동하는 카메라로 담아놓은 장면이 들어있다. 그 자체로는 말 그대로 단순한 장면. 그러나 그 단순한 장면이 전해주는 정서적 효과는 영화를 보고 나서도 지속될 정도로 인상적이다.




해당 장면을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보자. 수엔 부인과 친구들의 마작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수리첸에게 눈이라도 붙이라고 말하고는 초우모완은 신문에 연재할 무협소설을 집필하겠다고 한다. 서로 마주보고 있던 자세에서 초우모완은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하고 수리첸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이때 정지한 상태로 두 사람을 보여주던 카메라는 오른쪽으로 천천히 수평 이동하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프레임의 왼쪽에 있던 수리첸은 점점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그런데 수리첸이 화면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겠다 싶을 즈음 그녀는 상체를 초우모완 쪽으로 조금 움직여 몸의 절반 정도가 프레임 왼쪽 경계에 걸친 채로 소설 집필 진도를 물어보고, 이때 카메라는 초우모완이 대답하는 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고 나면 카메라는 다시 왼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여기에 맞추기라도 하듯이 수리첸은 초우모완 쪽으로 움직였던 상체를 카메라의 운동과 동일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왼쪽으로 이동하고 이번에는 초우모완의 모습이 화면 밖으로 사라져 가는데, 앞선 카메라의 이동에서는 수리첸이 프레임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것과 다르게 여기에서 초우모완은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그런데 초우모완이 화면 밖으로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자신의 집으로 가지 못하는 상황을 곤혹스러워 하는 수리첸의 모습과 그녀의 등 뒤에 있는 옷 장 거울에 반사되어 보이는 소설을 쓰는 초우모완의 모습이 정지한 카메라에 담겨 있는 이미지이다.


왕가위의 영화에서 인물의 마음은 종종 그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의 공간으로 외화되거나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의 공간은 종종 그 인물의 마음으로 내화되고는 한다.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화양영화]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초우모완과 수리첸의 대사에 "우리는 그들과 달라요"라는 대사가 있다. 이 말은 초우모완과 수리첸의 관계는 바람을 피우고 있는 자신들의 배우자와는 다르다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이들은, 바람을 피우고 있는 자신들의 배우자나 그들 주위에 있는 이웃들 몰래 때때로 만나면서도 자신들이 서로를 사랑하거나 욕망하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우리는 그들과 달라요"라는 말로 서로의 관계를 (재)확인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있음에도, 아마도 저들은 "우리는 그들과 달라요"라는 말을 의미 그대로 믿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저 둘의 관계가 자신들의 말과는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이미지 그 자체로 드러낸다. 수리첸이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는 순간 마치 초우모완이 부드럽게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프레임 안으로 수리첸의 상체가 들어올 때, 또는 초우모완이 프레임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수리첸의 등 뒤에 있는 거울에 마치 수리첸의 마음속이 비추인 것처럼 초우모완의 모습이 보이게 될 때,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는 저 둘은 이미 사랑에 빠졌으며 각자의 마음에 상대방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담아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감정을 영화에서 다룬다고 할 때 감정은 그 자체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카메라로는 감정 자체를 담을 수 없다. 영화에서 감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감정에 반응하거나 반응하지 않는 표면을 포착하거나 감정에 기반 하여 이루어지거나 깨어지는 관계를 카메라로 담는 것이 가능한 방식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화에서 어떤 감정을 보게 된다고 할 때 그것은 스크린이라는 표면에 펼쳐지는 관계의 변화에 관한 이미지인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영화로 표현할 때도 역시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이야기한 장면에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단 한마디의 말도 들어 있지 않으며 감정을 이미지화하려 동원된 과잉된 장치도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카메라가 각각 한 번씩 수평 이동하는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움직임만으로 [화양연화]에서의 초우모완과 수리첸의 마음을 말 그대로 볼 수 있다. 영화의 영어 제목인 "In the Mood for Love"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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