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G. 제발트Winfried Georg Sebald의 [토성의 고리]를 읽었다(미리 말하면 이 글은 [토성의 고리]에 관한 서평이 아니며 제발트 소설에 관한 이런저런 소회를 풀어놓는 것이다). 제발트의 소설은 읽은 사람에게 여운이 오래 남는 작품인데, 이것은 [토성의 고리]를 읽은 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제발트라는 작가가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했지만, 번역본이 나오는 순서대로 소설을 읽으면서 이제는 그의 번역되지 않은 나머지 소설도 하루빨리 한국어로 번역되기를 고대하는 한 사람의 독자가 되어버렸다(여기에 더해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충실한 독자가 되고 싶다). 제발트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1990년부터 2001년에 걸쳐 모두 네 권의 소설을 남겼고 그 중 [이민자들]이 2008년에 [아우스터리츠]가 2009년에 각각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온바 있다. [토성의 고리]는 작년 8월에 번역본이 나왔지만, 얼마 전까지도 나는 이 소설이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작년 연말에 종로도서관에서 우연히 번역본을 발견하게 되어 대출을 할 수 있었는데, 본의 아니게 일찍 일어난 일요일에 도서관에 가서 책 구경을 하느라 문학 서가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까지도 [토성의 고리]를 읽기는커녕 번역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나의 경우, 특별히 찾을 책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도서관의 서가 주위를 어슬렁거릴 때는 공부가 잘 되지 않거나 책을 읽으면서 딴 생각이 수시로 떠올라 읽던 책에 집중을 할 수 없을 때가 대부분인데, 책 구경으로 그저 시간만 보낸 것이 아니라 제발트 소설의 새로운 번역본도 발견할 수 있었으니 공부할 시간에 딴 짓 하면서 얻어 걸린 것 치고는 정말 큰 수확이었던 셈이다.
제발트에 관한 소개를 보면 "현재 가장 활발히 논의되는 독일 (문학) 작가"라는 말이 항상 따라다니지만, 그의 소설은 독일에서는 뒤늦게 주목받았고 오히려 미국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제발트의 소설이 독일보다 미국에서 먼저 주목을 받은 데는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소개가 일정 정도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실은 나도 그녀의 글로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나에게 제발트라는 작가의 존재를 알려준 손택의 글은 [비탄에 잠긴 정신]으로 이 글은 2000년에 [Times Literary Supplement]에 쓴 글을 그녀의 예술 에세이 모음집인 [강조해야 할 것]에 재수록 한 것이다. 나는 이 글을 [강조해야 할 것]의 한국어 번역본이 나온 2006년에야 읽었지만, 그녀가 이 글을 쓸 당시에는 그녀뿐만 아니라 제발트도 아직 살아있던 시기였다(제발트가 앞서 말한 교통사고를 당한 해는 2001년이고 손택은 2004년에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이 글은 손택이 쓴 제발트에 관한 글로는 유일하게 내가 읽은 것이지만 아마도 이 글이 제발트에 관한 그녀의 유일한 글일 것 같지는 않다. 미국에서 제발트가 주목을 받는데 손택이 일정 정도 역할을 했으며 [비탄에 잠긴 정신]이 제발트의 [현기증]이 영어로 번역된 것에 맞추어 쓴 글임을 생각해본다면, 그 이전에 영어로 번역된 제발트의 다른 소설에 관한 글을 썼거나 그의 문학 세계에 관한 종합적인 소개 글을 썼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손택의 [비탄에 잠긴 정신]은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문체로 작가를 소개하면서 (그녀가 글을 쓸 당시에는 아직 발표되지 않은 소설인 [아우스터리츠]를 제외한) 제발트의 세 권의 소설에 관한 비평을 전개하고 있는데, 글을 처음 읽었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도 나에게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것 중 하나는 제발트에 관한 그녀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문학의 위대함이란 지금도 가능할까? 문학적 야심이 사라져가고 열의는 없으면서 입심만 좋으며 무자비하게 냉혹한 인물이 소설의 일반적 주제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문학에 대한 고귀한 기획은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영어권 독자들에게 이것에 대해 답해주는 몇 안 되는 작가들 중 한 명이 제발트이다." 인용한 문장은 [비탄의 잠긴 정신]의 첫 문단인데,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한 명의 소설가를 두고 과연 이보다 더한 칭찬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 글을 읽을 때쯤에는 손택의 이런저런 글을 어느 정도 읽은 상태였기에 그녀의 예술적 감식안이 얼마나 탁월한가를 잘 알고 있었다. 알다시피 손택은 다양한 예술 장르에 관한 글을 썼고 그 중에는 훌륭한 글이 많이 있다. 그래서 그녀의 글을 매개로 새로운 예술 작가의 세계에 입문 하거나 이미 알고 있던 예술 작가에 관한 새로운 성찰을 얻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를테면 [해석에 반대한다]에 실려 있는 [로베르 브레송 영화의 영적 스타일]이라는 글로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 영화에 관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비단 나 혼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손택이 "문학의 위대함이란 지금도 가능할까?"라는 질문에 관한 응답으로 제발트의 소설을 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잊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그는 위대한 작가였던 것이다.
나에게도 제발트의 소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러니까 누군가 나에게 최근 몇 년 사이에 읽은 소설 중 가장 인상적인 소설은 누구의 것이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제발트!"라고 답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어떤 작가의 소설을 매우 인상적으로 읽었다는 것이 반드시 그 작가의 소설을 매끄럽게 잘 읽었다는 의미로 연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처음 제발트의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그의 소설을 단 번에 읽어내지 못했고 이것은 가장 최근에 읽은 그의 소설인 [토성의 고리]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누가 그의 소설을 매끄럽게 읽어나갈 수 있을까? 제발트의 소설을 읽을 때,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매번 같은 과정을 반복하곤 했다. 다시 말해 제발트의 소설을 읽을 때는 목적지에 도달할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해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니는 사람처럼 그렇게 문장의 흐름을 놓치고 머뭇거리곤 한다. 그래서 어디에서부터 길을 잃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왔던 길을 더듬어 되돌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이미 읽었던 부분으로 되돌아가게 되고, 더 심하게는 중간까지 읽은 소설을 아예 처음부터 다시 읽게 되기도 한다(나는 [아우스터리츠]를 읽을 때 중간 부분까지 읽던 것을 없던 것으로 하고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물론 제발트의 서술 방식이 쉬운 독해를 허락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제발트 자신이 "어떤 독일인도 그렇게 말하지 않을 인공언어"로 그의 소설에서의 언어구사를 표현한 적이 있지만, 무수한 관찰과 지식이 열거 되는 그의 문장과 때로는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이어지는 문장 그리고 구술하듯이 이어지는 서술은 독서의 흐름을 이어가는 데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제발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길을 읽게 되는 것이 그의 소설 세계가 쓸데없이 뒤틀린 서술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제발트의 소설을 읽으며 길을 읽고 문맥을 놓칠 때마다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역사 속으로 죽어 사라진 존재들을 떠올리고, 그 떠올린 존재들에 관한 기억의 파편을 복원하는 것은 어떤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결코 쉬운 일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제발트가 펼쳐놓은 소설의 세계에서 등장인물은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은, 독일군에게 죽임을 당할 위험에 처한 유태인 어린이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실시되었던 탈출 작전인 '어린이 수송Kindertransport'과 관련된 기억과 연관된 것일 때도 있고([아우스터리츠]), 한 개인에게 맡겨진 커다란 작업을 끝낸 후에 마음속에 번져가던 공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보여행을 떠나는 것일 때도 있다([토성의 고리]). 그런데 이 여행자의 여행은 정해진 목적지에 직선적으로 도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으며 이러한 여행자의 여정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죽은 존재들의 흔적을 더듬어 나가거나 불현듯 만나게 되는 과정과 겹쳐 있다. 등장인물이 여러 경로로 이어지는 여행의 동선에서 죽은 존재들의 흔적을 마주치는 것은, 마치 사라진 존재들을 기억하기 위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지나간 시간의 파편을 하나하나 맞추어 나가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등장인물이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해서, 그 여행의 끝에서 죽은 존재들이 기억의 복원이라는 작업을 매개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제발트의 소설에서는, 죽은 존재들과 그 죽은 존재들과 관련 있는 살아있는 존재들을 서술하기 위해 종종 백과사전적인 지식이 동원되지만, 그 많은 설명을 읽고 나서도 우리는 그렇게 설명된 존재들이 기억하기의 과정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위안을 얻지 못한다. 제발트의 소설에서 등장인물의 여행은 황폐한 이미지를 배경으로 우울한 정서가 지속되는 여정이다. 손택은 [비탄에 잠긴 정신]에서 [토성의 고리]를 언급하면서 "우울의 상징인 토성을 따라가는 여행은 제발트가 1990년대 전반에 썼던 세 작품의 공통된 중심 소재"이며 "'파괴'는 그가 주로 다루는 주제"라는 핵심적인 지적을 하고 있다. 제발트의 소설은 손택의 말처럼 '파괴'를 다루는 데 그가 '파괴'를 다루는 것은 '파괴' 자체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파괴당한 존재들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탐욕과 자연의 위력으로 파괴당하는 동 · 식물에 이르기까지, 파괴당한 존재에 관한 지대한 관심으로 역사에 묻혀 있는 죽은 존재들의 복원을 시도한다.
제발트의 소설은 죽은 존재들의 무덤 앞에 있는 하나의 비문 더 나아가 그의 소설 자체가 죽은 존재들이 묻혀 있는 역사의 무덤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소설의 등장인물은 죽은 존재들을 피해갈 수 없고 그들의 여정은 파괴로 인해 사라진 존재들의 파편들과 마주치는 것으로 시종일관하는데, 여기에서 제발트는 죽은 존재들을 기억의 차원으로 복원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도 그렇게 소설에 서술된 존재들을 손쉽게 애도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제발트가 자신의 소설에서 수행하는 기억하기를 매개로 하는 복원의 작업은, 죽은 존재와의 분리를 이루어내는 애도의 작업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죽은 존재와의 분리가 완결되지 않은 우울에 가까운데, 이것은 죽어 사라진 존재를 문학이라는 형식을 통해 필사적으로 복원해 낸다 하더라도 파괴당한 존재의 구원을 말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제발트의 소설이 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고도의 윤리가 내재되어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죽은 존재들과 연관된 역사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한 우리는 애도라는 형식으로 과거의 죽은 존재들에게 손쉬운 작별을 고하면 안 된다는 것. 그러나 나는 제발트의 소설에서 감각하게 되는, 뛰어난 미학과 고도의 윤리를 내재하고 있는 그 우울함이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는 말을 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비판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의 소설은 우울한 정서를 담고 있지만 결코 자기 연민과 냉소에 빠지지 않는 놀라울 정도의 긴장을 유지하는데, 제발트가 보여주는 이러한 우울은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에 필적할 만한 부정의 역사인식, 곧 손쉬운 구원과 강요된 화해를 거절하는 작가의 역사인식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발트가 보여주는 우울함이 나에게는 버겁고 감당하기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버겁다고 해서 그의 소설에서 도망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소설에 담겨 있는 우울함이 주는 버거움은 파괴당한 존재의 역사를 생각할 때에 느낄 수밖에 없는 죽어 사라진 존재들의 무게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보탬: 나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그의 소설인 [현기증]도 하루빨리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까지 그의 소설이 2008년부터 매년 한 권씩 출간된 것을 보면 [현기증]의 번역본을 올해 안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현기증]이 나오면 먼저 이 소설을 읽은 후, 제발트의 네 권의 소설을 한국어로 번역된 순서가 아닌 원서가 출간된 순서에 맞추어 모두 다시 읽어 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