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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브람스'.

무한한 연습 2019. 11. 11. 22:14


본래라면 신경을 있는 대로 써 가며 가을 중으로 정리를 해 놓아야 하는 일들이 있었는데, 사정이 생겨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면서 계획했던 일을 마무리 짓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올봄에만 해도 가을이 되면 계획했던 일들을 통과한 후 다음 스텝은 무엇일지를 생각하고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9월 중순이 넘어가면서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역시 계획이라는 것은 뜻 한대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어쩌면 대체로) 그렇게 되지 않기도 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고 말았다. 그 여파로 최근 두 달 정도의 시간을 조금은 허탈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보낸 듯하다. 그러면서 그 시간 동안 가까운 친구(가 있는 자리)를 제외하면 누군가를 만나러 나가지 않았고 그 대신 되도록 혼자 있는 시간을 갖고자 했는데, 이럴 때 (친구 이외에) 찾게 되는 것의 하나가 음악이었다. 뭐랄까, 음악은 틀어놓고 있으면, 눈을 감거나 음악이 나오는 방향에 몸을 맞추어 집중하지 않아도 음악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들려오는 음악에 몰입하든, 문득 떠오른 생각을 따라가느라 듣고 있는 음악에서 이탈하든, 음악을 틀어놓고 다른 무엇을 하든, 하여튼 음악을 들으며 또는 듣지 않으며 함께 있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였지만, 최근에는 음악을, 그중에서도 브람스의 음악을 많이 들었다. 나에게 있어 브람스의 작품은 말 그대로 곁에 머무르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음악을 좋아하기에 휴대폰에 음악 파일을 집어넣을 때도 몇몇 극소수 음악가의 작품들과 함께 그의 음악은 언제나 최애의 위치에 올라 있다. 그러다 보니 한편으로는 가을엔 브람스라는 식의 표현을 접할 때면 브람스의 음악을 특정한 계절로 한정해 버리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 두 달 정도의 심정으로 가을을 맞이하게 되면 가을의 정서와 브람스의 음악을 연결하는 데 서운한 감정을 느끼기는커녕 도리어 그렇게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감상이 가능한 데는 브람스의 음악에 음울한 그림자라고 부를 만한 사운드가 담겨 있고 전반적으로는 밝은 곡조로 느껴지는 음악에서조차 언뜻언뜻 그림자가 드리워지고는 하는 음악이 그의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비평가 알렉스 로스는 비평집 [리슨 투 디스](뮤진트리, 2014)에 수록된 [슬픈 자에게 축복이 있으리라]라는 더할 수 없이 근사한 글에서 브람스의 음악을 행복과 슬픔이 예기치 않게 교차하는 가운데 감정의 진실이 드러나는 쪽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춤곡과 그림자가 있는음악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브람스 [교향곡 1](1876)을 베토벤 [교향곡 9](1824)처럼 고난과 역경을 넘어 환희의 세계로 넘어가는 음악으로 설명한 후에 낭만적 영웅주의로 집약될 내러티브가 브람스의 성향과는 잘 맞지 않았음을 지적하면서 쓴 표현인데, 브람스의 음악과 함께 할 때면 매번 곱씹게 된다. 다만 브람스에 관한 나의 감상에는 춤곡과 그림자가 있는음악보다는 춤곡이 펼쳐지는 가운데서도 그림자가 드리워지고는 하는음악이 더 마음에 와닿는 표현이겠지만 말이다(그럼에도 브람스의 음악을 오로지 무거운 음악으로만 규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Bach to Brahms: Essays on Musical Design and Structure](University of Rochester Press, 2015)에 수록된 음악학자이자 피아노 연주가인 윌리엄 킨더만William kinderman[“Capricious Play”: Veiled Cyclic Relations in Brahms’s Ballades op. 10 and Fantasies op. 116]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소수의 작품이더라도 브람스의 음악에는 즉흥적이고 유희적인 관점으로 다가갈 수 있는 음악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람스의 음악을 좋아하고 특히 이번 가을에 들어서 거의 매일 들었던 데에는 그의 음악에 담겨 있는 음울한 정서에 이끌린 이유가 크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느껴지고는 하는 고도로 지성적인 면모가 나에게는 음울한 정서만큼이나 중요하게 작용했다. 아직까지도 감정과 지성의 영역이 서로 공유될 수 없는 것이어서 감성을 키우는 데 지성은 불필요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기만적인 주장이 존재하지만, 괴언怪言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 없는 저러한 주장에 대하여 브람스의 음악은 가장 강력한 반론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의 음악에서 듣게 되는, 말 그대로 조락凋落의 악상으로 들려오는 사운드조차, 단순히 죽음과 연결되는 아이디어를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 나타나는 절멸의 악상이라거나 지나간 순간을 추억하는데 매몰된 결과로 노스탤지어적인 감상에 한없이 머무르게 되는 음악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의 음악에 파괴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없어서가 아니다. 위에서 소개한 로스의 글에서는 지나친 해석으로 경계하는 사례이기는 하지만, 음악학자 라인홀트 브링크만Reinhold Brinkmann[Late Idyll: The Second Symphony of Johannes Brahms](Harvard University Press, 1997)에서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민음사, 2010)를 거론하며 브람스의 [교향곡 4](1885)을 설명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 베토벤 [교향곡 9] 이후에 환희의 송가로 마무리되는 교향곡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 파국적인 상황에 어울릴 법한 음악으로 브람스 [교향곡 4](1885)4악장을 이야기하는 사례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브람스의 음악은 파괴적인 국면에서조차 파괴 자체에 몰두하거나 낭만적 영웅주의에 휩쓸리는 대신 (어떤 형태와 내용일지는 알 수 없으나 반드시) 도래할 미래로 연결될 현재의 시간에서 고뇌하고 분투하는 한 명의 음악가를 상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또한 그의 음악에는 분명 과거에 관한 진심 어린 존경이 담겨 있으며 그렇기에 회고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브람스가 과거를 바라볼 때 그것은 그 시간 속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과는 일정하게 구별되는 태도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브람스는 천재였을 뿐 아니라 부단한 노력을 투여하는 학구적인 작곡가이기도 했는데 그런 그가 가장 힘썼던 부분의 하나가 이전 세대의 작품을 깊이 있게 연구하여 자신의 음악적 역량으로 흡수하는 것이었다. 브람스에게 과거는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숙고해야 할 대상이었지 그리울 때 돌아가서 현재와 절연하는데 이용하는 시공간이 아니었다(이런 의미에서 나는, 마이클 채넌이 [헨델에서 헨드릭스까지](경성대학교출판부, 2008)에서 아도르노에 기대어 논의한 말러에 관한 장에서, 말러의 음악을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를 훌륭하게 결합한 작품으로 이야기하는 반면 브람스의 음악을 과거로 도피하는지점이 있는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일정한 의문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바로크 시대의 샤콘과 대위법을 매개로 작곡된 어둑한 관현악곡이나 합창곡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것도, 현실의 세계에서 음악이 당면한 문제를 이전 세대의 음악사를 활용하여 멀리 우회하더라도 결코 회피하지 않는 음악적 표현 그 자체이다.

 

아마도 이런 지점이 적지 않은 사람들을 여전히 브람스의 세계에 머무르게 하는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같은 이유로 그의 음악으로 되돌아오고는 한다. 물론 최애에 속하는 음악에는, 그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을 되돌아오게 만드는 힘이 있기에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여러 음악을 가로지르더라도 어떤 순간이 오면 바로 그 음악으로 되돌아가고는 한다. 존 애버크롬비John Abercrombie(기타)(특히 마크 펠드먼(바이올린)이 쿼텟 멤버로 있었던) [Class Trip](2004)부터 그 이후로 이어지는 [Within A Song](ECM, 2012)[39 Steps](ECM, 2013)에서 들려준 음악, 1969년에 결성된 야마시타 요스케 트리오山下洋輔トリオ의 일원으로 와카마츠 코지(와 아다치 마사오)의 영화인 [천사의 황홀](1972)과 다양한 예술가들이 참여해 만들어낸 집단음악무용극 [](Frasco, 1977)에서 폭풍 같은 프리재즈를 들려주었으며 21세기 두 번째 10년대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폭발적인 에너지가 담겨 있는 음악을 들려주고 있는 사카타 아키라坂田明(클라리넷)[ARASHI](TROST RECORDS, 2014)[PROTON PUMP](Family Vineyard, 2018)에서 들려준 음악은, 나로 하여금 기꺼이 그들의 음악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 싶게 만드는 작품들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브람스의 음악도 속한다.

 

그런데 브람스의 음악에는 애버크롬비와 사카타처럼 그 음악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힘이 있으면서도 저 음악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감상적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브람스만큼이나 애버크롬비와 사카타도 사계절 내내 듣지만 이들의 음악에서는 브람스처럼 계절적 순환에 따른 반복이라는 요소가 더해지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가을에 브람스를 듣고 있으면 함께 인생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러기를 바라는 음악을 한 해가 기울어가는 시점에 (다시) 듣는다는 느낌을 받고는 하는데, ‘가을엔 브람스라는 너무나도 뻔한 표현이 지금까지도 이야기되는 데에는 계절의 정서를 느끼게 하는 이상으로 계절에 따른 특정한 반복을 함께 한다는 느낌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러한 감상은 대규모 관현악곡들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나의 경우에는 실내악곡을 들을 때 더욱 그런 느낌을 받게 되는 것 같다. 이를테면 1891년에 마이닝겐 궁정 오케스트라의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리하르트 뮐펠트의 연주에 감동 받아 생애 말년에 작곡한 [클라리넷 오중주](1891)[클라리넷 삼중주](1891) 그리고 두 곡의 [클라리넷 소나타](1894) 같은 곡들 말이다.

 

세상에는 무수한 음악이 있고 그만큼 좋아하는 음악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어떤 음악은 다른 음악보다 더욱 애착이 가는 대상으로 다가오고는 한다. 사실 처음 브람스의 음악을 들었을 때 나는 그의 음악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 [교향곡 1][이중 협주곡](1887)으로 브람스를 듣기 시작했는데 이 음악들을 싫어하지는 않았음에도 그 이후 긴 시간 감상에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없어서는 안 되는 음악이 브람스의 작품들이다이 글을 쓰면서도 브람스의 [피아노 오중주](1864)[교향곡 4] 그리고 [클라리넷 오중주]를 순서대로 틀어놓았었는데 이 음악들을 들으며 역시 나는 그의 음악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또다시 하게 되었다. 고통 가운데서도 고뇌를 포기하지 않으며 슬픔 가운데서도 모든 것을 놓아버리지 않는 음악. 당면한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 어떤 손쉬운 약속도 하지 않지만 바로 그런 방식으로 곁을 내어주기도 하는 음악. 나에게 브람스의 음악은 이러한 의미와 느낌을 갖는다. 내 곁에 있어서 다행인 음악.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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