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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두 권의 책인 [출발점 1979~1996](황의웅 옮김, 박인하 감수, 대원씨아이, 2013)과 [반환점 1997~2008](황의웅 옮김, 박인하 감수, 대원씨아이, 2013)을 읽으면서 나는 미야자키와 그의 작품에 관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 알게 된 사실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 더 명확해지는 느낌들, 과거에는 선명하게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으나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오히려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문장들. 하여튼 미야자키의 두 권의 책은 나로 하여금 그와 그의 작품에 관하여 여러모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은 미야자키의 역사인식을 볼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는 그의 글과 대담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역사(학)에 커다란 관심과 애정이 있다 보니 어떤 것을 접해도 역사(학)에 관련된 것을 생각하려는 버릇이 있다. 이것은 일본에 연관된 것을 접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미야자키의 책을 읽을 때도 역사적인 배경을 수시로 떠올리고는 했고 여기에 더하여 미야자키의 발언과 그의 최신작과 관련하여 있었던 여러 이야기들이 작용을 하기도 해서 다른 때보다 더욱 역사적인 맥락에 신경을 써가면서 읽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일전에 썼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두 권의 책: 서평은 아닌, 개인적인 소회]라는 글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출발점]과 [반환점]에는 미야자키에 관한 다채로운 기록들이 담겨 있으며 그 중에는 미야자키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알 수 있는 기록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저 두 권의 책을 읽다보면 미야자키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이해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가 있는데, 나는 여기에 미야자키의 두 권의 책에 수록된 여러 기록들에서 그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글 하나를 옮겨놓은 후 그 글에서 내가 느끼게 된 인상과 생각을 덧붙이고자 한다.

 

내가 블로그에 옮겨놓으려는 미야자키의 글은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재배식물과 농경의 기원]]이라는 글이다.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재배식물과 농경의 기원]]은 1988년 6월에 미야자키가 발표한 글로 본래는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에서 나오는 저널인 [세카이世界]의 임시증간호에 발표한 것을 나중에 [출발점]을 낼 때 다시 수록한 것이다.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재배식물과 농경의 기원]]은 일본의 유명한 식물/인류학자인 나카오 사스케中尾佐助의 [재배식물과 농경의 기원栽培植物と農耕の起源](岩波書店, 1966)이라는 책과 관련된 특별한 인연을 말하기 위해 미야자키가 쓴 것이다. 아마도 미야자키의 개인사에 관하여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글의 제목만으로는 도대체 애니메이터/애니메이션 감독인 미야자키와 [재배식물과 농경의 기원]이라는 책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제목과 농경문화를 연구한 것으로 보이는 책의 제목이 나란히 붙어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카오의 [재배식물과 농경의 기원]은 미야자키가 여러 자리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생의 책으로 이야기했던 것으로, 그에게는 인생의 애니메이션이라 할 수 있는 야부시타 타이지藪下泰司의 극장 애니메이션 [백사전白蛇伝](1958)(미야자키는 자신이 애니메이터를 지원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작품으로 [백사전]을 꼽는다)과 레프 아타마노프Lev Atamanov의 극장 애니메이션 [눈의 여왕Snezhnaya koroleva](1957)(미야자키는 자신이 애니메이터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게 만들어 준 작품으로 [눈의 여왕]을 꼽는다)만큼이나 의미가 있는 책이다.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재배식물과 농경의 기원]]은 미야자키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보여주는 그에 관한 여러 기록들에서도 압축적으로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글이다. 미야자키는 [모노노케 히메もののけ姫](1997)의 공간적 배경을 구성하면서 나카오의 [재배식물과 농경의 기원]에 기반 한 '조엽수림문화론照葉樹林文化論'에서 받은 영향을 작품에 그려 넣었을 정도로 나카오의 문화론에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반환점]에 수록된 [모노노케 히메]에 관한 대담에서도 역사학자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와 '조엽수림문화론'에 관하여 의견을 나누는 미야자키의 모습을 접할 수 있다), 미야자키의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재배식물과 농경의 기원]]을 읽고 있으면 [모노노케 히메]에 구현되어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영향을 나카오의 책에서 받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아시아·태평양전쟁과 '전후' 일본에 관한 그의 역사인식이 이야기될 때마다 나에게는 항상 미야자키의 저 글이 먼저 떠오르곤 했고, 몇 년 전에 [출발점]과 [반환점]을 발췌독으로 처음 읽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 한국어 번역본으로 전독을 하는 가운데 다시 읽어보아도 역시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재배식물과 농경의 기원]]이라는 글은, 미야자키의 다른 기록들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포스트묵시록적 작품들 이를테면 [미래소년 코난未来少年コナ](1978~1979)-[바람계곡의 나우시카風の谷のナウシカ](1984)-[천공의 성 라퓨타天空の城ラピュタ](1986)와 같은 전쟁과 전체주의적 폭력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의 초기 작품들보다도, 미야자키라는 애니메이션 예술가가 가지고 있는 역사관과 세계관에 관하여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알려 주고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럼 미야자키의 글로 들어가기 위한 내 나름대로의 도입부는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고 아래 옮겨놓은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재배식물과 농경의 기원]]의 전문을 이제 읽어보도록 하자. 전문이라고는 하지만 책에 수록된 분량이 2쪽 반이 안 되는 글이므로 전혀 길지 않은 글이다. 미야자키의 글에 관한 나의 인상과 생각은 다음에 이어 남길 글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

 

우리는 신서 세대(역주/ 분량도 적고 내용도 어렵지 않아 읽기 쉬운 신서에 빗대어, 당시 젊은 세대가 가볍고 깊이가 없었음을 돌려 얘기하는 듯하다)라고 불렸다. 60년 안보투쟁 후, 곧 마르스크주의에 이별을 선언한 모 교수한테서 어차피 너희는 [세계]와 신서 정도밖에 읽지 않겠지란 말을 듣고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 신서 한 권이 내게 결정적인 영향을 남겼다. 그 책은 나카오 사스케의 [재배식물과 농경의 기원]이다.

 

나는 일본인 대부분이 패전으로 자신감을 읽고 민주주의로 전향하는 시기에 세상 물정을 알게 되었다. 일본은 세계에 '자연과 사계의 변화의 아름다움'만 자부하면서, 어른들은 인간만 많고 자원은 부족하고 국민 수준도 낮은 삼등국이라며 스스로를 비웃었다. 일본의 역사는 인민이 탄압받고 수탈을 당하기만 하는 역사로, 농촌은 빈곤과 무지와 인권 무시의 온상이었다. 지금이라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농가의 이엉지붕도 내게는 그 아래가 마치 어둠 속 세계처럼 느껴져서 무서웠다. 영화 속에서 사는 데에 서투른 성실한 청년이 좌절과 절망에 허덕이는 모습을 보고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강은 맑고 논밭은 넓게 펼쳐져 있었지만, 그것은 가난함의 증명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어느 샌가 일본을 싫어하는 청년이 되어있었다.

 

주위에는 중국인을 사살한 것을 자랑하는 어른들이 있었다. 아버지의 친척은 전쟁 군수로 오히려 경기가 더 좋았고, 그 때문인지 공습으로 죽은 사촌형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소집도 면제되었다. 어머니는 패전 때의 변절을 이유로 진보적 지식인을 경멸하고 "인간은 어쩔 도리가 없다"며 불신과 단념을 아들에게 불어넣었다. 나는 표면은 밝고 사리분별도 잘하는 아이였지만, 내심은 허약하고 소심한 소년이었다. 전쟁기록물을 좋아해서 깡그리 읽었다. 그러면서 패턴화한 형용사의 과잉표현에 싫증나기 시작해, 기분 좋은 승리담의 뒷면에 숨겨진 일본군의 온갖 어리석은 면에 마음속 깊이 낙담했다. 나의 싸구려 민족주의는 열등감 컴플렉스로 바뀌어 일본인을 싫어하는 일본인이 되었다. 중국과 한국, 동남아시아 각 나라들을 향한 죄의식에 전율하며 내 존재 자체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심정적 좌익이 되었지만, 헌신해야 할 인민을 발견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암담하고 우울한 생각으로 고뇌하며 메이지 신궁의 인기척 없는 뒷길을 산책해도 어쩌다 거울을 보면 밝고 쾌활한 내 눈을 발견하고는 이내 질려버렸다. 나는 무언가를 긍정하고 싶어서 우물쭈물 거렸다. 모순되고 분열되어 근본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일본국과 일본인과 그 역사를 싫어하며 서양의 러시아, 동양의 문물에 동경을 품었다. 애니메이션 일에 종사해도 외국을 무대로 하는 작품을 좋아했다. 일본을 무대로 하려고 생각하면서도 민화, 전설, 신화, 모든 것을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 균열은 작품을 위해 외국으로 로케이트 헌팅을 가게 되고 난 후부터 점차 심각해졌다. 동경했던 스위스의 농촌에서 나는 짧은 다리를 가진 동양의 일본인이었다. 서구의 길모퉁이 유리에 비치는 지저분한 사람 그림자는 틀림없는 일본인인 나였다. 외국에서 일장기를 보면 혐오감이 드는 일본인이었다.

 

[재배식물과 농경의 기원]은 정말 우연히 손에 쥐게 되었다. 찾으면 언젠가는 만난다거나 운명의 만남 같은 말로 꾸미지 않겠다. 나는 읽어가면서 내 눈이 아득히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바람이 지나간다. 국가의 틀도, 민족의 벽도, 역사의 답답함도 발끝 아래로 멀어져서 조엽수림의 생명의 입김이 떡이나 낫토의 끈적끈적함을 좋아하는 내게 흘러들어온다.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던 메이지 신궁의 숲과, 조몬 중기 때 신주에는 농경이 있었다는 가설을 제창하던 후지모리 에이이치를 향한 존경과, 말하는 소질이 있는 모친이 반복해 들려주던 야마나시 산촌의 일상들이 모두 하나로 엮여 내가 무엇의 후예인지를 알려주었다.

 

나에게 사물을 보는 견해의 출발점을 이 책이 가르쳐주었다. 역사에 대해서도, 국토에 대해서도, 국가에 대해서도, 이전보다 훨씬 더 잘 알게 되었다.

 

나카오 사스케가 장대한 가설을 어려운 대 논문이 아니라 쉬운 문장의 신서란 형태로 만들어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자동차나 가전제품으로 자신감을 회복하지 않고, 한 권의 신서가 내게 힘을 준 것이 기뻤다. 그를 가졌던 것이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했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댓글
  • 프로필사진 NeoPool 잘 읽고 갑니다. 돌연한 자기긍정의 서사가 왠지모르게 께림칙하긴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도 사셔야 했겠거니. 2013.08.22 08:37
  • 프로필사진 무한한 연습 미야자키의 글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러가지 생각을 들게 하는 글인 것 같아(^-^). 2013.08.22 18:30 신고
  • 프로필사진 번역해주~~~~~~ㅋㅋ 2013.08.22 13:03
  • 프로필사진 무한한 연습 무엇을? 나카오의 책? 2013.08.22 18:31 신고
  • 프로필사진 게슴츠레 다음 포스트가 기대되네요. "신서 세대"라는 부정적 평가 속에서 자기 인식을 찾는 '애니메이터 미야자키'와 전전 제국주의의 폭력적 남성상과 전후 민주주의의 반성적 자아 어디에서도 길을 찾지 못하다가 조엽수림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는 '자연인(또는 일본인) 미야자키'이 머릿속에 그려지네요. 2013.08.22 19:06
  • 프로필사진 무한한 연습 기대하실 만한 포스트는 아닙니다(^-^;). 말 그대로 미야자키 글에 관한 메모인데 좀 길게 쓰는 메모일 뿐입니다.

    게슴츠레님께서 글에 관한 인상을 말씀해주시고 또 아래 인용을 하시기도 했지만, 미야자키의 글은 미야자키라는 예술가를 이해하는데 있어 일본의 근현대사와 함께 여러모로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인 것 같습니다.
    2013.08.23 23:47 신고
  • 프로필사진 게슴츠레 "국가의 틀도, 민족의 벽도, 역사의 답답함도 발끝 아래로 멀어져서 조엽수림의 생명의 입김이 떡이나 낫토의 끈적끈적함을 좋아하는 내게 흘러들어온다." 2013.08.22 19:08
  • 프로필사진 noi 그에게 "아득히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지는 느낌"을 일으킨 [재배식물과 농경의 기원]이 매우 궁금해지고 있습니다- 다음 포스트가 무척 기다려져요.

    실없는 소리 하나: 여기 와보니 스위스 사람들 키나 외모가 대단히 훌률한 편이 못되는데도 미야자키 사마가 스스로에 대해 저런 표현('지저분한' '짧은')을 하는 걸 보니 갈등하는 그의 심리가 느껴져 마음이 그렇습니다.. (그랬던 마음을 [재배식물과 농경의 기원]이 단박에 씻어줬단 말이죠? 어떻게?? 아우 궁금해요^^)
    2013.08.30 18:07 신고
  • 프로필사진 무한한 연습 "실없는 소리"라고 하셨습니다만, 스위스에서 살고 계신 noi님의 말이니만큼 저에게는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그나저나 위의 포스트에 이어서 올리려 했던 다음 포스트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글을 다 쓰기는 했는데요, 쓰고 나서 읽어보니 여러모로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일단은 비밀글로 저장을 해 두었어요. 나중에라도 공개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noi님의 기다림과 궁금함에 부응을 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ㅠ_ㅠ).
    2013.08.31 02:24 신고
  • 프로필사진 NeoPool 국가의 틀도, 민족의 벽도, 역사의 답답함도 어깨 위에서 짓누르며 희생된 이의 죽음의 입김이 피웅덩이의 끈적끈적함을 무서워하는 내게 흘러들어온다. 돌연한 은퇴 선언이라니, 6일날 뭐라고 이야기할지 좀 들어보아야 하겠다. 2013.09.02 08:36
  • 프로필사진 무한한 연습 돌연한 감이 없진 않지만, [모노노케 히메] 이후에 복귀한 후에도 은퇴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님. 아마도 체력과 지브리의 상황을 보았을 때 은퇴를 해도 되지 않겠는가, 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닌가 싶어. 2013.09.02 21:52 신고
  • 프로필사진 윤천 이 글 후편은 언제 나오나요ㅠㅠ 2014.02.22 07:58
  • 프로필사진 무한한 연습 위에 보이는 제가 지인에게 남긴 댓글에서도 이야기를 했는데요, 글은 이미 썼는데 제가 의도한 바와는 다른 글이 되어서 비밀글로 저장을 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공개할 생각이 없구요 앞으로도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혹시 기다리고 계셨다면 죄송합니다(ㅠ_ㅠ). 2014.02.24 03:31 신고
  • 프로필사진 Kin 이 글이 올라온지 꽤 되었는데 아직 후편은 없나요? 2018.04.09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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