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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얘기지만 이 책은 시대의 산물이다. 만약 이 책의 원형이 된 박사논문을 준비하던 시기에 '뉴라이트'를 자처하는 이들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바탕으로 건국되었다는 식의 주장을 펴지 않았더라면, 내 관심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뉴라이트'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은 1948년 제정 당시의 대한민국헌법만 읽어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제정 당시의 대한민국헌법을 실제로 읽어본다는 '번거로운' 작업을 하지 않으리라는 예상이 그들의 뻔한 거짓말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면, 이는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1990년대에 '냉전 승리'를 계기로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 미국 지식인의 메타메시지가 더 이상 역사를 돌아보지 말자는 것이었듯이, 남북한의 체제 경쟁이 남한 체제의 승리로 끝났다고 주장하고 싶은 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지닌 역사성을 더 이상 생각하지 말 것을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완성된' 자본주의의 모습이 시작도 끝도 없는 원환圓環인 것처럼,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현재’만이 중요하겠지만, 다른 사회, 다른 세계를 꿈꾸기 위해서는 '역사'가 필요하다.

 

니체가 우리에게 역사가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지식의 정원에 있는 무위도식의 응석받이가 필요로 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필요하다고 했듯이, 그리고 니체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벤야민이 역사 인식의 주체는 몇 세대에 걸친 패배자의 이름으로 해방의 임무를 완수하는 전투적 피억압계급이라고 했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역사'는 무엇보다도 '적대'의 역사일 것이다. '적대'라고 하면 친구-적이라는 이분법을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적대라는 것을 이미 만들어진 주체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전선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다양한 적대들로 전선이 형성되는 가운데 주체들은 만들어진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것이 먼저 있어서 지배-저항 관계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지배와 저항이라는 각각의 적대적 실천을 통해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동적인 적대들이 항상 이미 존재하기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논하며, '우리'의 경계선을 둘러싼 정치에 관심을 기울인다. 민주주의 근원에 있는 적대에 대한 감각은, 우리가 '식민지 이후', 그리고 '민주화 이후'를 살아가고 있기에 더욱 절실한 것으로 생각된다. 적대를 덮어버린 자리에서 민주주의는 자라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가가 해야 할 일은 역사 속에 묻혀 있는 다양한 적대의 지점들을 드러냄으로써 매끄럽게 보이던 '역사'의 결에 수많은 균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업일 것이다. 탄탄한 것처럼 보이는 역사가 수많은 조각들을 조합해서 만든 가건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우리의 현재 역시 또 다른 조합 가능성으로 열리기 시작한다."

 

 

내가 '후지이 다케시藤井たけし'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한 편의 서평과 한 권의 번역서를 통해서였다. 서중석의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역사비평사, 2005)에 관한 서평인 ['지도자의 역사'를 넘어서기 위한 첫 걸음]([역사비평], 2005년 여름])과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의 [번역과 주체: '일본'과 문화적 국민주의](후지이 다케시 옮김, 이산, 2005). 내 기억으로는 서중석의 책에 관한 서평과 사카이의 책을 비슷한 시기에 읽은 것 같은데 둘 중 어느 것을 먼저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 편의 서평과 한 권의 번역서로 '후지이 다케시'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기억하게 되었다는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후지이의 [제1공화국의 지배 이데올로기: 반공주의와 그 변용들]([역사비평], 2008년 여름)을 포함하는 여러 논문과 정영혜鄭暎惠의 [다미가요 제창: 정체성 · 국민국가 일본 · 젠더](삼인, 2011)처럼 그가 한국어로 번역한 책을 읽고, 오시마 나기사大島渚의 영화와 재일조선인의 역사에 관한 그의 설명과 견해를 들을 기회를 뜻하지 않게 갖게 되면서(후지이는 2010년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의 한 좌담회에서 통역과 패널을 동시에 맡았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일제식민지시기와 재일조선인에 관한 역사적인 설명 그리고 오시마의 영화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했는데, 오시마의 [교사형絞死刑](1968)과 로베르트 비네Robert Wiene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Das Cabinet des Dr. Caligari](1919)을 비교해 가며 이야기했던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한국현대사를 연구하는 소장학자로서의 '후지이 다케시'라는 이름을 주기적으로 마주치고는 했다.

 

지금은 후지이의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족청계의 형성과 몰락을 통해 본 해방8년사](역사비평사, 2012)를 읽고 있다. 더 정확하게는 이제 막 읽기 시작했다, 라고 해야겠지만 말이다(이 책은 그의 박사논문인 [족청 · 족청계의 이념과 활동](성균관대학교 사학과, 2010)을 수정해 출간한 것이다. 책으로 나온다는 이야기를 지인에게 들은 후 논문을 읽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책이 출간되었을 때는 정작 바로 읽지를 못했었다). 위에 인용한 글은 후지이의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족청계의 형성과 몰락을 통해 본 해방8년사]에 있는 것으로 이 책의 [책머리에]의 첫 두 문단을 블로그에 옮겨놓은 것이다. 말 그대로 이제 막 읽기 시작했기에 내가 이 책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사실 책 제목을 보았을 때 "제3세계주의"라는 표현과 "사이에서"라는 표현이 거의 즉각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족청에 관해 잘 알지 못하고 책 내용으로도 들어가지 못했기에 책의 본론을 읽기 전에 무언가 이야기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제3세계주의"와 "사이에서"라는 제목의 일부가 거의 즉각적으로 눈에 들어온 이유가 없지는 않다. 책제목에 있는 "제3세계주의"를 넓은 의미에서 반제국주의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면 왜 '제3세계 민족주의'나 '제3세계 사회주의' 또는 이 둘의 합성어가 아닌 "제3세계주의"로 표현한 것일까, 그리고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 족청(계)를 위치시킨다면 족청(계)는 본래 극우파가 될 운명이었던 것이 아니라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유동적으로 형성되고 몰락한 집단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일까, 라는 물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물음은 책을 읽으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책의 첫 두 문단을 블로그에 옮겨 놓는 것은 다른 세계를 꿈꾸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역사'가 필요하"고 그 역사는 다른 무엇도 아닌 "'적대'의 역사"여야 한다는 후지이의 글이 나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른바 '포스트(모던이 붙은 여러)주의'가 역사학을 휩쓸고 지나간 후, 역사학에서 '적대'라는 개념은 역사가가 지향해야할 역사관을 드러내는 개념으로는 거의 거론하지 않게 되었다 하더라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근대 역사학'으로 불리는 여러 역사학이 비판을 받을 때 '적대'라는 개념도 비판을 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적대'라는 개념은 역사를 역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이기보다는 정태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개념으로 비판을 받았고, 역사를 폭넓고 세밀하게 파악하기보다는 폐쇄적이고 단순하게 파악할 수밖에 없는 개념으로 비판을 받았기에 사실상 '적대'라는 개념으로 현재의 우리에게 필요한 역사관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닌 것으로 인식되었다. 물론 그런 비판을 받은 데에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후지이가 자신의 역사관을 드러내는 글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역사'는 무엇보다도 '적대'의 역사일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면서도 바로 이어서 "'적대'라고 하면 친구-적이라는 이분법을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적대라는 것을 이미 만들어진 주체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전선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라고 이야기한 것도 '적대'라는 개념으로 파악하고 표현한 과거의 역사학에는 긍정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부정적인 측면도 분명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적대'의 역사"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가 역사를 탐구할 때에 '적대'의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에서 '적대'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적대'는 분명히 존재하나 그것이 존재하는 양상이 다양한 전선에서 유동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적대의 양상을 어떻게 역동적이면서도 섬세하게 표현할 것인가가 문제라면, '적대'라는 개념은 유행이 지나서 폐기해 버리기보다는 오늘날의 역사학에도 필요한 핵심적인 개념으로 재전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역사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적대'라는 개념을 폐기해 버리는 것은 역사학에 있어 뼈아픈 손실일 것이다.

 

역사에 다양한 전선으로 존재하는 '적대'를 살펴본다고 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역사 인식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역사에 존재했던 지배자의 승리와 영광은 그들 자신만의 힘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자신의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김광규 옮김, 한마당, 1999)에 수록된 [어느 글 읽는 노동자의 의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지배자의 승리와 영광에는 역사에 이름이 남지 않거나 희미하게 남은 무수한 사람들의 노동과 희생이 들어있다. "성문이 일곱 개나 되는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 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 나와 있다. / 왕들이 손수 돌덩이를 운반했을까? / (……) / 역사책의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 /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 십년마다 한명씩 위대한 인물이 나온다. / 누가 그 대가를 치렀던가. / 그처럼 많은 이야기들 / 그토록 많은 의문들." 다른 하나는, 역사에는 지배자의 지배를 거스를 수 없는 질서로 받아들여 순응하거나 그들의 지배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지못해 끌려 다닌 사람들만 있던 것이 아니라, 지배에 저항한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하워드 진Howard Zinn이 [미국민중사](유강은 옮김, 이후, 2008)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비록 희미한 것일지라도 역사에 있었던 저항의 흔적을 역사이야기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일은 역사를 창조적으로 생각하고 만들어 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첫걸음인 것이다. "역사서술의 목적이 그저 과거를 지배하는 실패만을 되풀이해서 요약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가들을 끝없는 패배의 순환에서 공모자로 만드는 일이다. 역사가 창조적이려면, 또 과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미래를 예견하려면, 일순간 스쳐 지나간 일일지언정 사람들이 저항하고 함께 참여하고 때로는 승리하는 능력을 보여줬던 과거의 숨겨진 일화들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강조해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지배자가 역사를 전유하는 방식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기에 이름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무수한 사람들을 기억하거나 지배질서를 당연히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저항했던 여러 사람의 흔적을 역사이야기의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다. 지배자에게 필요한 역사는 그들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현재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욕망과 연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배자에게 역사란, 그들의 승리로 종결되는 내용과 그 승리를 정당화하는 서사적 형식으로 이루어진, 다시 말해 그들이 승리를 쟁취한 현재의 시공간으로 마치 진화하듯이 전개되는 단선론적 역사이야기 외에 다른 것이 아니므로 역사에서 그들의 승리는 정해져 있는 것이고 그들의 지배는 예비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지배를 행사하고 있는 현재라는 시간을 지속시키기 위해 과거를 전유하는 지배자의 방식은, 그들이 갖고 있는 과거에 관한 인식과 함께 그들이 바라는 미래가 어떤 것인지도 짐작하게 한다. 지배자에게 미래란 현재의 지배가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결국 그들에게 역사는 영원한 현재를 가능하게 하는 (위에 인용한 후지이의 표현을 빌리면) "원환圓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에서 있었던 지배자의 승리와 영광은 그들만의 힘으로는 결코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역사에는 지배자의 지배가 관철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지배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흔적도 들어있다는 인식은, 역사를 할 수 있는 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하면서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있는 역사적 재료를 제공한다. 지배자가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조차 그것을 지속하는 것이 혼자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그들이 지배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피지배자로 위치 지어지거나 상정된 사람들을 향한 고려와 포섭 그리고 폭력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한다. 역사가 지배자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것은 역사는 지배자들이 전유하고자 하는 역사이야기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며 그러한 역사이야기는 역사에 있었던 여러 양상을 은폐하거나 발굴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구성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세계를 꿈꾸기 위해 필요한 역사적 상상력은, 역사에서 있었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만들어낸 여러 적대의 양상을 탐구하면서, 지배자의 억압에 맞서 분투했던 흔적과 그 분투하는 과정에서 미처 실현되지 못한 대항적 잠재력을 현재라는 시공간에 접속 가능하도록 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세계가 우리에게 현상現象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진화과정의 결과이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 속에 존재했던 여러 가능성들이 지배의 계기로 포섭되고 억압되었으며 분쇄되어 버린 결과로 그렇게 된 것일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다른 세계를 꿈꾸고 싶다면, 그냥 역사가 아닌, '적대'의 계기와 흔적이 담겨 있는 '역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댓글
  • 프로필사진 가끔은 너의 한마디에 잠시 숨을 고르고 간다.
    물론 나를 향한 외침이 아닌, 불특정다수 혹은 스스로에게 건네는 무언가이겠지만서도 말이지.

    물론, 읽고 생각하고.... 지워진다. ㅋ

    조만간 한잔 해야 하는데,
    일도 일이지만, 연애도 그렇고... 흠.
    최근 독립을 하려는 나의 투쟁이 힘겹고 지난한 단계에 들어섰다네.
    그래서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핑계를 나지막히 외쳐...야지 ㅎㅎ
    2013.04.23 11:29
  • 프로필사진 무한한 연습 나도 너와 대화를 나눌 때 다시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어. 또 네가 겪은 경험을 통해서 모르던 것들을 알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고. 너는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너에게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고 있단다(^-^).

    세 번째 문단에 있는 내용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무얼 하든 많이 아프지 않으면 좋겠는데...... 하여튼 나름 잘 버티면서 지내고 있으면 좋겠다(^-^).
    2013.04.23 12:04 신고
  • 프로필사진 뎡야핑 아 조으다 근데 나는 <왕좌의 게임> 시청에 어떤 태도로 임해 왔던가... < 2013.04.24 12:14
  • 프로필사진 무한한 연습 뎡야핑이 조으다니까 나도 조으다(*^-^*). 2013.04.24 14:2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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