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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중경삼림](1).

무한한 연습 2013. 3. 3. 22:35

 

 

오래전에 왕가위王家衛의 [중경삼림重慶森林](1994)을 처음 보았을 때 그리고 그 후에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여러 번 다시 보았을 때에도 동일하게 느낀 것이 있었다. 그것은 크게 두 개의 이야기로 구분할 수 있는 이 영화에서, 언제나 나는 경찰 223(금성무金城武)과 노란 레인코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쓴 금발머리 킬러(임청하林靑霞)가 나오는 첫 번째 이야기보다는 경찰 633(양조위梁朝偉)과 야식전문점 미드나잇 익스프레스Midnight Express의 아르바이트생 페이(왕페이王菲. 아마도 그녀의 이름을 왕페이보다는 왕정문王靖雯으로 기억하거나 뒤의 이름을 더 익숙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본래는 본명이 '페이'이고 예명이 '정문'인데 1989년에 데뷔할 때는 왕정문이라는 예명으로 데뷔했지만 1994년부터 본명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중경삼림]의 크레딧에도 王菲로 표기되어 있다)가 나오는 두 번째 이야기에 더 많은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다. [중경삼림]의 첫 번째 이야기가 좋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 233과 킬러가 나오는 영화의 첫 번째 이야기를 나는 매우 좋아한다. 그럼에도 나의 마음은 역시 두 번째 이야기에 더 많이 이끌렸는데, 심지어 233과 킬러의 이야기가 끝난 후 페이와 633이 나오면서 두 번째 이야기로 넘어갈 때는 기다리던 영화가 이제야 시작한다는 느낌을 받기까지 했다. 이것은 이 영화를 다시 본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중경삼림]의 두 번째 이야기에 관한 글을 블로그에 남기려 한다.

 

[중경삼림]의 두 번째 이야기는 The Mamas & The Papas의 [California Dreamin'](1965)이 나오는 가운데 페이와 633이 영화에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한다(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 영화에서의 페이와 633의 첫 등장은 이 부분이 아니다. 이 둘은 앞의 이야기에 아주 잠시 나오기 때문이다. 왕가위는 [중경삼림]의 첫 번째 이야기에서 233과 킬러 외에도 다음 이야기에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는 3명의 배우를 한 번씩 보여주고 있다). 633은 경찰이다. 밤 근무를 할 때의 그는 늦은 밤까지 일할 때가 있는 스튜어디스 애인(주가령周嘉玲)에게 주기 위해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야식을 산다. 페이는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의 아르바이트생이다. 그녀는 다른 곳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 사촌 오빠의 부탁을 받고 얼마 전부터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일을 하고 있다. 633과 페이는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처음으로 서로를 알게 된다.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한 후 거의 바로 나오는 633과 페이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애인에게 야식을 전해주기 위해 633이 여느 때처럼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 와서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페이에게 샐러드를 주문한 후 잠시 동안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 포장된 음식을 들고 그곳을 떠나는 장면을 말이다. [중겸삼림]의 두 번째 이야기는 633과 페이가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마주치거나 잠시 동안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주는데,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를 배경으로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는 633과 페이가 나오는 장면중에서도 처음으로 보게 되는 장면은 이상한 방식으로 연출되었다.

 

633이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 와서 식품진열대 앞에서 일을 하고 있는 페이에게 주문을 할 때 그녀는 일반적으로 점원이 손님을 응대하는 방식으로 그를 대하지 않는다. 633은 샐러드를 주문한 후에도 페이에게 말을 걸지만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CD 플레이어에서 나오는 [California Dreamin']의 리듬을 타면서 음식을 포장한다. 세상 어딘가에 이런 식으로 주문에 응대하는 점원이 있을 수는 있지만, 자신을 바라보면서 말을 걸고 있는 손님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 같은 행동을 보이면서 주문에 응대하는 점원을 일반적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왕가위는 여기서 더 이상한 장면을 만든다. 주문한 음식을 포장하는 동안 633과 페이는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대화를 나누는데, 페이의 질문에 633이 "샐러드"라고 대답을 하는 장면을 왕가위는 서로의 얼굴과 시선이 엇갈리게 하는 방식으로 보여준 후, 숏이 바뀌면 주문한 음식을 들고 뒤돌아 떠나가는 633의 얼굴을 페이가 순간적으로 보는 것으로 연출했다. 이 장면들은 [California Dreamin']에 맞추어 등장하는 633과 그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페이의 모습 그리고 특별한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쉬지 않고 이어지는 대화 때문에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 무언가 경쾌한 느낌을 주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두 인물의 모습을 통해 어떤 공허함을 주는 장면으로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633은 계속해서 페이에게 말을 하지만 그녀와는 시선이 맞지 않아 허공에 대고 말을 하는 것 같고, 페이는 단 한 번 얼굴을 들어 633을 보기는 하지만 너무 짧은 순간만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왕가위는 영화의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해서 처음으로 만나는 633과 페이의 간격을, 만일 서로가 연인이라면 다정히 마주보며 밀어를 나눌 수 있을 거리까지 다가가게 한 다음, 둘의 옆얼굴을 모두 보이게 한 상태에서 시선과 말이 허공을 향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래서 이 장면을 보는 우리는 633과 페이가 서로에게 애정은 물론이거니와 관심이라고 할 만한 것도 아직까지는 거의 없다는 것을 영화적 이미지를 통해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그 후, 관심이 거의 없던 서로의 관계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다. 밤 근무를 하는 633은 애인에게 야식을 주기 위해 변함없이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를 찾고 페이는 그가 오기 직전에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식품진열대 바로 뒤편에 있는 조리실로 들어간다. 633은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의 사장과 대화를 나누다 포장된 음식을 들고 그곳을 떠나고, 조리실에 있던 페이는 그제야 다시 식품진열대로 나온다.

 

이 부분에서 페이는 633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거의 쳐다보지도 않은 사람을 계속해서 보기 시작한다. 633이 오기 전에 조리실로 들어간 페이는 633과 사장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633을 계속해서 훔쳐보는데, 영화에서 이 장면은 사장과 음식진열대를 중심으로 화면을 앞뒤로 분절한 후 [California Dreamin']의 리듬을 타면서 조리실에서 633을 보는 페이를 보여주는 숏과 633을 보는 페이의 시점 숏처럼 보이는 숏으로 나타내고 있다. 또한 633이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를 떠나자마자 다시 식품진열대로 나온 페이는 그 후에도 골목길로 사라져가는 633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그가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다시 바라보기도 한다.

 

손님에 관한 예의로라도 얼굴을 보아야 하는 사람을 어떻게든 보지 않다가, 나중에는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라진 공간마저도 계속 보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자신의 시선이 가고 있는 사람에게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관심은 페이가 조리실에서 633을 훔쳐보는 장면에서 웃는 얼굴이 나오는 것으로 보건대 좋지 못한 감정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페이는 633을 좋아하게 된 것일까? 그래서 633이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음에도 그가 걸어간 방향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던 것일까? [중경삼림]에는 페이가 633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숏은 없다. 그러나 633을 향한 그녀의 관심이 어떤 종류의 감정인지를 보여주는 숏은 들어있다.

 

여느 때와 동일하게 633은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 야식을 사러 와서는 앞에 나온 장면처럼 사장과 대화를 나누는데 이 부분에서 페이는 633이 오는 것과 동시에 조리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오는 것에 맞추어 식품진열대로 나오고 있다. 그러니까 앞의 장면과는 반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인데 여기에서 페이는 자신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 나온다.

 

[중경삼림]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항상 같은 옷만 입고 다닌다. 경찰과 스튜어디스처럼 제복을 입는 직업을 갖고 있는 인물들뿐만 아니라 은밀하게 사람을 죽여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타인의 시선에 띄지 않아야 하는 킬러조차 날씨에 관계없이 언제나 노란 레인코트를 입고 다닌다. 페이는 그렇지 않다. 페이의 옷이 화려하게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주요 등장인물들에 비해 그녀의 옷은 두 번째 이야기의 초반부부터 여러 번 바뀌는 편이다. 그리고 여러 번 바뀌는 페이의 옷에는 그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앞의 문단에서 이야기한 장면에서 633이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 온 것을 알고 페이가 식품진열대로 나올 때 그녀가 입고 있는 상의에 주목해보자. 그 옷은, 하얀색 바탕에 다른 무엇도 아닌 파란색 하트가 그려져 있는 옷이다. 말 그대로 애정 어린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옷. 나는 이 옷을 입고 있는 페이가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다. 자신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옷을 입고 나온 후 잠시 동안 어쩔 줄 몰라 하다 근처에 있는 물통과 걸레를 집어 들고 어색하게 유리를 닦으며 633을 바라보는 페이의 모습은 정말 잊기 힘들다.

 

 

하트가 그려진 옷을 입고 나오는 장면 이전에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 오는 633을 보고 페이가 조리실로 숨듯이 들어가는 모습이 나오는 장면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지만 아직은 그 마음을 확실하게 알지 못하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마음에 드는 사람을 일단 피하고 보는 행동을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그리고 조리실에서 식품진열대로 굳이 나올 필요가 없음에도 하트가 그려진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이제는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되었고 또한 확실하게 감추기도 어렵게 된 페이의 상황을 나타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중경삼림]의 두 번째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페이가 633에게 빠져드는 모습을, 동어반복을 무릅쓰고 다시 말하면 페이가 사랑에 빠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자신의 연정을 느끼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하는 페이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제 한 번 좋아하는 마음을 드러낸 페이는 더 이상 처음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그녀는 더 많은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633이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사장과 대화를 나눌 때 페이는 조리실에 숨지 않고 그가 그녀를 볼 수 있는 자리에 자신을 드러낸다. 또한 페이는 미드나잇 익스프레스가 아닌 시장에서 633을 마주칠 때에도 그와 나란히 걸으며 대화를 나눈다. 급기야 633의 집에 몰래 들어갈 수 있는 경로가 열렸을 때 페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집에 잠입하기까지 하는데, 여기에서 그녀는 633의 집에 잠입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들어간 공간을 자신의 연정으로 하나하나 채워 나가기 시작한다.

댓글
  • 프로필사진 오랜만에 왕정문보네 ㅎㅎ 라이센스판이 풀리기 전에, 명동에 있는 중국대사관 앞에서 CD를 샀던 기억이 새록새록...
    1이라는 숫자는 시리즈물로 연재를 하겠다는건가?
    글은... 집에 가는 길에 스마트폰으로...ㅋㅋ
    2013.03.05 13:18
  • 프로필사진 무한한 연습 나도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어(^-^). 그런데 역시 너도 나처럼 왕정문이 익숙한 세대구나. ㅋㅋㅋ. 2013.03.05 16:05 신고
  • 프로필사진 세대, 라는 성급한 판단을 내리다니=0=
    나에게 왕정문이란, 대중적으로는 서태지와 아무로 나미에의 대항마이자, 작게는 아다치 월드의 현신이라할 수 있는...=0=
    일반적으로 진성이라 부를 수 있는 부류라기보다는 혐의적(협의 아님)으로 팬이라 불리는...=0=
    따라서 소소하고 풋풋하지만 우아하다 할 수 있는....
    '익숙한'이라 분류되는 것에 조금은 어색하다는 말을 네줄요약 하는 것이 이리 어려울 줄이야.=0=
    새벽댓바람부터 머리아프다=0=

    2013.03.12 08:29
  • 프로필사진 무한한 연습 이게 무슨 말이야. ㅋㅋㅋㅋㅋㅋㅋ. 알겠어. 내가 잘 알아 들었어. 왕정문을 향한 너의 마음 잘 알았어(^-^). ㅋㅋㅋ. 2013.03.12 11:12 신고
  • 프로필사진 아ㅓㄴ라 전 이 영화의 내용이 전혀 이해가 안가네요 2013.04.30 23:07
  • 프로필사진 무한한 연습 그러시군요. 사실 [중경삼림]이 내러티브를 숏의 순서로 복기하려고 하면 쉽게 잘 안되는 영화이기는 합니다(^-^;). 2013.05.01 04:1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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