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한스-울리히 벨러Hans-Ulrich Wehler



― 서독과 동독이 1990년 10월 3일에 통일되어 (다시-새로운) 하나의 독일이 되기 이전인 1980년대의 서독에서는 두 개의 대대적인 역사 논쟁이 있었다. 하나는 1986년에 독일의 대표적인 보수주의 역사가인 에른스트 놀테Ernst Nolte가 독일의 일간지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사라지지 않을 과거]를 기고한 후,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디 차이트]에 놀테를 포함하는 보수주의적 역사가들의 역사 인식을 비판하는 [손비처리: 독일현대사 서술의 변명적 경향들]을 기고함으로써 촉발된 '역사가논쟁Historikerstreit'이다. 다른 하나는 '독일의 특수한 길' 테제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영국의 맑스주의 역사가들인 제프 일리Geoff Eley와 데이빋 블랙번David Blackbourn의 공동 저작인 [독일 역사학의 신화 깨뜨리기]가 1980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후, 1982년 독일의 뮌스터에서 열린 전국 역사학 대회에서 일리와 블랙번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독일근현대사 연구에 관한 전면적인 비판적 논의를 중심으로 격렬한 논쟁이 촉발되어 적지 않은 시간동안 논의가 이어지게 되는 '독일의 특수한 길Deutscher Sonderweg' 논쟁이다(책 제목 [독일 역사학의 신화 깨뜨리기]는 2007년에 출간된 한국어 번역본의 것이다. 독일에서 처음 출간 되었을 당시의 제목은 [독일 역사 서술의 신화들: 좌절된 1848년 시민혁명Mythen deutscher Geschichtsschreibung. Die gescheiterte bürgerliche Revolution von 1848]인데, 제목에서 저자들이 어떤 부분을 염두에 두고 서술 했는지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일리와 블랙번은 독일에서 책을 출간한 후 자신들의 책에 관한 여러 반응을 고려하여 부분적인 수정을 거쳐 4년 후인 1984년에 영어판으로 다시 책을 내는데 제목은 다음과 같다. [독일사의 특수성들: 19세기 독일의 부르주아 사회와 정치The Peculiarities of German History. Bourgeois Society and Politics in Nineteenth-Century Germany]. 영어판에는 1980년에 출간된 독일어판을 번역한 한국어판에는 들어있지 않은 내용이 있다. 한국어판만 읽는 것도 분명 유익하지만, 약간의 번거로움을 감수한다면 한국어판은 영어판과 함께 보는 것이 여러모로 더 유익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역사가논쟁'을 촉발시킨 놀테의 글 [사라지지 않을 과거]의 핵심적인 내용은 나치 시대의 유태인 학살은 인종말살이 아니라, 볼셰비즘에 대한 일종의 공세적 방어에 따른 행위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치에 의해 건설된 아우슈비츠 같은 강제 수용소의 존재는 '독일 민족 특유의 야만성'이 드러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련의 강제 수용소인 굴락Gulag의 존재와 그곳에서 벌어진 야만적인 행위와 같은 (놀테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아시아적 범죄행위'의 영향을 받은 것에 불과하며, 강제 수용소에서 가스를 살포하여 대규모의 인명을 살상한 것을 논외로 한다면 인류 역사에서 학살은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독일근현대사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논의 중 하나인 '독일의 특수한 길' 논쟁을 촉발시킨 일리와 블랙번의 [독일 역사학의 신화 깨뜨리기]의 주요 내용은 1부 [독일의 '특수한 길'과 영국식 모델]과 2부 [도대체 무엇이 없었다는 말인가]라는 두 개의 주제 아래, 독일이 유럽의 영국과 프랑스와는 다르게 정상적 경로의 근대화를 거치지 못하고 특수한 근대화의 경로를 밝았기에 독일제국의 최종 경로가 나치즘으로 귀결되고 말았다는 서독의 빌레펠트 학파Bielefelder Schule를 중심으로 '역사적 사회과학Historische Sozialwissenschaft'을 표방했던 '비판적 사회사가'들과 여러 사회사가들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역사가논쟁'과 '독일의 특수한 길' 논쟁이 한창 벌어질 당시에는 서독과 동독이 수 년 내에 통일 될 것임을 알지 못했겠지만, 통일 이후의 시점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저 두 논쟁을 생각하는 내 위치에서는 무언가 기묘한 느낌이 드는 것을 감출 수가 없다. 왜냐하면 두 논쟁 모두 나치 집권기를 중심으로 독일의 근현대사가 '정상적'인 것인가 '예외적'인 것인가를 중심으로 '독일 근현대사의 예외성'이라는 인식틀을 다시 짚어보게 만들었던 통일이라는 사건이 일어나기 수 년 전에 격렬한 형태로 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어떤 의미에서 독일이 통일되었다는 것은 '독일의 특수한 길' 테제를 해소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새롭게 추인하는 사건으로 볼 수 있지 않은가? 의미심장하게도 하버마스만이 아니라 위르겐 코카Jürgen Kocka도 독일 통일을 '만회혁명Aufhol-Revolution'으로 부르지 않았는가? 개인적으로 바라기는 멀지 않은 때에 이 부분에 관하여 약간의 정리를 할 수 있으면 싶다). 물론 '역사가논쟁'과 '독일의 특수한 길' 논쟁이 동일하다는 것은 아니다. '독일만의 예외성'이라고 주장되었던 기존의 일반적인 역사 인식을 일종의 '비교사적 관점'을 통하여 비판적으로 재검토한다는 측면에서 둘은 닮은 것 같지만, 독일 보수주의(독일 보수주의를 말할 때는 어느 정도 세밀한 구분이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일단 보수주의로 한다)의 계보를 잇는 놀테와 맑스주의 역사학에 토대를 두고 있는 일리와 블랙번의 문제제기를 같은 선상에서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 집권기라는 시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결코 적지 않은 시간동안 독일의 근현대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예외성'과 '정상성'이라는 두 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하게 만드는 역사적 경험으로 작용했으며, 또한 '예외성'과 '정상성'이라는 두 개의 카테고리는 나치 집권기를 포함하는 독일근현대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사적 인식론으로 작용했다.

― 1945년 직후 수 년 동안의 독일현대사를 보면, 1949년에 독일연방공화국Bundesrepublik Deutschland, 곧 서독이 성립하기 전까지의 미군정 시기에 있었던 이른바 '탈나치화Entnazifizierung' 작업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탈나치화'에 실패한 역사로 이야기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독일 역사학계도 마찬가지여서 강성으로 나치에 동조하여 나치시대 당시의 과거를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나치 정책에 관여하는 연구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더라도 전후 독일에서 계속 강의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독일 역사학계는 일종의 폐쇄적인 동업 집단zunft으로 유명했으며 독일의 교수자격심사 제도는 심사위원의 생각에 합치되는 역사인식을 공유하는 사람들만을 뽑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해서 역사학계의 폐쇄성을 허물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동업 집단을 지킬 수 있기도 했다. 그래서 6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독일 역사학계의 상황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전후 일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나은 '과거 청산'을 이룩한 독일'의 모습과는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일정 정도 거리가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단절의 부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1945년 이전 시기와 연속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독일 역사학계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지 이거스George Iggers가 [현대사회사학의 흐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그냥 우연은 아닌 것이다. "1945년도 서독 역사가들에게 아무런 단절을 가져오지 않았는데 (......) 연구소의 인적 구성은 전혀 변동되지 않았다. 대학에서 추방당하거나 또는 독일을 떠난 자유주의 내지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던 역사가들이 결국 귀환하지 않았다. (......)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나치의 역사학에 대한 정책을 지지했던 역사가들은 대학에 그대로 남아 있거나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다. 대학의 구조는 변화되지 않았고 역사가들을 임용하는 그 체제도 바뀌어 지지 않았다."

인적 구성에 변화가 없었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바뀌지 않은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거와 연속성을 가진 사람들의 관점이 극적으로 변하지 않을 경우, 그 사람들이 하는 역사학 연구는 과거의 관점이 현재로도 이어져 올 수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전후 독일에서 역사학 연구를 계속했던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1871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했던 독일제국을 바이마르공화국과 나치시대와는 달랐던 자랑스러운 역사로 (다시) 생각하는 동시에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사를 독일의 진정한 전통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시간으로 생각했으며, 리처드 에번스Richard Evans가 [다시 생각하는 독일사: 19세기 독일과 제3제국의 기원Rethinking German History: Nineteenth-Century Germany and the Origins of the Third Reich]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들은 입헌 군주정마저도 제도적 측면에서는 안정과 번영을 위한 최선의 방책으로 생각했다. 그런 까닭에 1945년 이전과 이후에 독일 역사학계에 몸을 담고 있었던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1945년의 상황을 (프리드리히 마이네케Friedrich Meinecke의 표현을 빌리면) '독일의 파국'으로 생각했지만, 이 '독일의 파국'을 극복하는데 있어 나치시대와 정면으로 대면하는 길을 회피하고 그 시대를 독일사에서 끔찍하기는 했지만 우연적으로 사건이 발생했던 시간으로 처리하여 독일사를 구원하고자 했다. 또한 미군정 이후에 성립한 독일 연방공화국의 정책, 곧 서독의 초대 수상으로서 1963년까지 수상직에 재임하면서 냉전정책에 기대어 '서구로의 통합Westintegration'을 실시한 콘라트 아데나우어Konrad Adenauer의 정책과 공명하는 방식으로 보편적인 서구적 가치를 주장하면서 나치시대의 역사를 서구적 가치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독일사를 방어하고자 했다(아데나우어는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그의 '서구로의 통합' 정책은 공산주의 국가들이 있는 공간인 동구와의 절연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기성세대에 속하는 여러 역사가들의 민족 단위를 벗어나는 역사적 사유도 이에 편승한 측면이 있는 것이었다).

이른바 '역사적 사회과학'을 표방한 빌레펠트 학파의 역사가들인 한스-울리히 벨러와 코카는 이전 세대 역사가들이 유지했던 1945년 이전과의 인적·제도적·학문적 연속성을 끊어내고, 독일 역사를 인식함에 있어 이전 세대 역사가들과는 다른 방향에서의 연속성을 역사학의 새로운 인식틀로 제시한다(한 가지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지금 이 글에서는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더라도 벨러와 코카가 '역사적 사회과학'을 주장할 수 있었던 기본적인 조건으로 적어도 두 가지는 언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전후로부터 1960년대까지 진행된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 [극단의 시대: 20세기 역사]에서 말한 서유럽적 차원에서의 "사회/문화혁명"을 통한 변화와 다른 하나는 전후 독일 역사학계에서 일어난 가장 유명한 논쟁 중 하나로 프리츠 피셔Fritz Fischer의 1961년 저작 [세계 패권의 추구Griff nach der Weltmacht]를 매개로 벌어진 논쟁인 '피셔논쟁Fischer-kontruverse'이 그것이다). '독일사의 예외성' 또는 '독일의 특수한 길'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전 세대 역사가들이 1945년 전후까지 이어져 있었던 인적·제도적·학문적인 것을 모두 포괄하는 역사적인 연속성과 단절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이 겪었던 나치시대를 독일사에서의 일탈이 아니면 비非서유럽적 가치에서 단절된 역사로 만드는데 주력했다면, 벨러와 코카는 독일사의 연속성, 다시 말해 나치시기를 '독일사의 특수성'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하여 독일의 급속한 경제적 근대화에 맞추어 제대로 된 정치·문화 구조를 갖추지 못했던 독일근대사가 결국에는 완전히 파열될 수밖에 없었던 시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들은 '역사적 사회과학'을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역사를 연구하는 것으로 주장했는데, 그 목적의식이란 벨러에 의하면 "장차 사회가 보다 더 합리적으로 지향될 수 있는 기회를 증대시키기 위하여 명백히 발전된 이론을 이용하고, 이를 통하여 과거를 이해하고 비판적 사회과학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새로운 역사학의 역할"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독일의 민족적 과거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쓰인, '역사적 사회과학'의 입장이 담겨 있는 벨러의 저작이 1973년에 출간된 (1871년의 프랑스와의 전쟁이 마지막을 장식하는 통일전쟁의 종결로부터 출발하여 1918년 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망을 계기로 막을 내린 독일제국의 역사를 다룬) [독일 제2제국]이다.

― 나치시대를 '독일의 특수한 길'과 연결하여 우리가 생각해 볼만한 논쟁이 1980년대 있었던 '역사가논쟁'과 '독일의 특수한 길' 논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나는 '역사가논쟁'도 모든 것은 아니더라도 상당부분은 '독일의 특수한 길'에 연결되는 논쟁이라고 생각한다. 나치의 만행이 독일만의 특수한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 놀테의 주장이었다면, 나치시대는 '독일사의 특수성'이 결정화 된 것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계몽주의와 관련된 서구의 가치에 더욱 깊게 결속해야 한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저 두 개의 논쟁이외에도 '독일의 특수한 길'의 비판자인 일리와 (입장을 일정 정도 수정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것은 고수하고 있는) 벨러가 1990년대 중반에 논쟁을 벌인 적이 있지만, 오히려 나치시대와 '독일의 특수한 길'을 염두에 둘 때에 독일 역사학계 내부에 치명적인 비판이었던 논쟁은 1998년에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98년 가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전국 역사학 대회에서는 나치시대에 학계에서 활동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치에 부역한 혐의를 전후 50여년이 지나 뒤늦게 받게 된 역사가들에 관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이 논쟁을 언급할 때 앞으로는 '나치시대 역사가논쟁'으로 통칭한다). 많은 사람들은 '나치시대 역사가논쟁'은 독일근현대사 연구에 있어 역사주의적 방법론에서 사회사적 방법론으로 넘어가는 가교의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는 (앞서 짧게 언급한) '피셔논쟁'이후 독일에서 있었던 역사관련 논쟁 중 최고의 것으로 평가할 정도이다. '나치시대 역사가논쟁'은 논쟁이 벌어질 당시에 전문학계와 언론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높은 관심을 받았지만, 독일근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금까지도 이 논쟁이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전후 독일의 새로운 역사학을 구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인, 구조사Strukturgeschicte의 대가인 베르너 콘체Werner Conze와 사회사Sozialgechichte의 수장인 벨러의 스승이면서 1945년 이후 독일 역사학계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 중 한명인 테오도르 쉬더Theodor Schieder가 이 논쟁에서 나치 부역 혐의를 받은 다른 학자들과 함께 비판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쉬더는 역사주의적 방법론을 일정정도 고수했으며 벨러와 필적할 만한 역량을 가졌던 또 다른 역사가인 토마스 니퍼다이Thomas Nipperdey의 스승이기도 하다).

'나치시대 역사가논쟁'에 관한 송충기의 논문에 의하면 이 논쟁에서의 쟁점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논쟁의 풍부한 논의를 역사적 상황과 지식사회학적 관점에서 내실 있게 정리한 논의로는 다음을 참고하면 된다. 송충기, [역사학과 과거청산: 나치시대 역사가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대구사학회, 2005. 나 또한 여기서부터는 송충기의 논문에 의지하여 글을 남기는 것이다). 첫째, 콘체와 쉬더 같은 나치시대 역사가들은 당시 나치즘과 어떠한 관계에 있었으며, 이들은 나치범죄에 얼마만큼 연루되었는가? 둘째, 콘체와 쉬더를 포함하여 나치 부역혐의를 받은 학자들이 관변사학자들은 아니더라도 나치의 이데올로기와 정책에 학문적 근거를 제공했다면 어떻게 그들이 전후 독일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학계에 남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역사학계를 선도할 수 있었는가? 셋째, 왜 '나치시대 역사가논쟁'이 벌어질 199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저들의 나치 부역혐의가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었는가? 전후 독일에서 있었던 '탈나치화' 작업에서 나치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이력이 드러난 학자들은 상당부분 학계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관변 사학자가 아니었던 학자들은 '탈나치화'의 과정에서 걸러지지 않고 거의 모두 학계로 복귀하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미군정의 '탈나치화' 작업이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욱 심각하게는 학계의 '탈나치화' 작업을 학계 자체에 맡겼던 것이 학계의 자정작용을 유도했던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학자적 생명을 존속시켜 주는 계기로 작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학계에 복귀한 많은 학자들은 나치시대에 가지고 있었던 자신들의 입장을 전후에 버렸다. 따라서 나치시대 동유럽 절멸정책과 관련 있는 '동유럽연구'에 가담한 쉬더와 전후의 쉬더를 정치적으로 완전히 같은 인물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문제는 남는다. 정치적 입장은 선회했더라도 과연 학문적인 부분도 그랬는가? 지금 이 글을 남기는 시점에서 내가 이 부분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쉬더의 제자가 벨러일뿐만 아니라 벨러(와 빌레펠트 학파)가 말한 '역사적 사회과학'이 사회사 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말해왔던 것과는 달리 새로운 역사학이 아니라 나치시대의 역사학과 일정 정도 연속성을 갖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물음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벨러와 코카 같은 전후 독일 역사학의 2세대에 속하는 인물들이 이전 세대 역사가들의 과거를 알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했는지(다른 시기도 아닌 68혁명이 있었던 1960년대와 '역사적 사회과학'을 포함하는 사회사가 확고하게 성립하는 시기인 1970년대에도 쉬더와 콘체를 포함하는 여러 역사가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다소 의외일 수 있는 것이다. 전후 독일 역사학의 2세대들만큼 나치시대를 비판적으로 언급한 역사가들은 그 이전에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60-70년대에 독일의 기성세대들은 여러 측면에서 나치시대와 확실한 단절을 하지 못했다고 비판받지 않았는가? 이를테면 1962년에 있었던 제8회 오버하우젠 단편 영화제에서 독일의 새로운 영화Das Neue Kino를 주장했던 감독들이 선언했던 것도 다름 아닌 "아버지 영화의 죽음"이 아니었던가?), 아니면 벨러가 말한 것처럼 이전 세대의 역사가들이 나름의 "반성적인 학습과정"을 거쳐 (제3제국이 아닌) "연방공화국의 역사가"로 변화될 수 있었기에 전후 독일의 2세대 역사가들이 이전 세대 역사가들의 나치시대 활동에 관하여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는지는 일단 논외로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관심사, 곧 '독일의 특수한 길' 테제를 염두에 두는 한에서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연구에 의하면 1960년대 후반 독일에서 성립하는 사회사와 1930-40년대에 있었던 나치의 정책과 부합하는 역사학적 작업들과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방법론적 유사성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독일의 사회사가들이 그들의 선배 역사가들처럼 나치 이데올로기에 편승하고 학문적으로 뒷받침 했다는 뜻이 아니다. 시간적으로 그들은 나치에 동조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만, 그 뿐만이 아니라 벨러와 코카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적 사회과학'은 말할 것도 없고 60년대 후반 이후 사회사에 종사한 역사가들은 독일의 파행적인 근대화와 나치의 성립과 관계가 있다고 인식된 독일 역사주의와의 역사인식론적인 단절을 통하여 사회사가 성립되었음을 주장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인식론적인 단절을 향한 사회사가들의 고투가 그들의 작업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역사학적 입장을 지지하는 중요한 근거였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만일 독일 사회사의 기원이 나치시대에 독일에서 활동했던 역사가들의 작업과 일정한 연속성을 갖고 있다면, '역사적 사회과학'을 포함하는 사회사에 전력투구했던 역사가들의 학문적 작업에 관한 논의는 그동안 그들에게 제기되어왔던 사회사에 관한 비판에 또 다른 차원이 추가된 상황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도 빌레펠트 학파를 포함하는 독일의 사회사가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연관되고 싶지 않았을 나치시대 역사학과 말이다.

댓글
  • 프로필사진 플레브스 무연님 어제 말씀드린 블로그는 http://sonnet.egloos.com/ 입니다. 워낙 유명한 곳이라 한번즈음은 가보시지 않았을까 싶네효... 2010.02.11 14:18 신고
  • 프로필사진 무한한 연습 주소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역시나 저는 모르던 곳이었습니다(-_-). 아- 웹 세계는 정말 넓어요. 저런 곳을 모르고 있었다니- 2010.02.11 17:40 신고
  • 프로필사진 NeoPool 매...맵핑이닷!!! (인가?) 선리플 후감상! 2010.02.11 15:23
  • 프로필사진 무한한 연습 오늘 일 하면서 조금 피곤했겠다. 오늘 저녁은 푹 쉬어(^-^)! 2010.02.11 17:40 신고
  • 프로필사진 NeoPool 에이 그걸 가지고 뭐가 피곤했겠어^^ 다만 다음날 일 때문에 한잔 더 하지 못한 것은 아쉽네. 조언 중에 글을 쓰라는 조언은 반드시 실행할 생각이야. 2010.02.12 11:17
  • 프로필사진 무한한 연습 역시 튼튼하구나. 으흐흑. 그래도 그날 꽤 길게 있었어. 6시에 만나서 1시가 넘어 헤어졌으니(^-^). 집에 가서 설 잘 보내고 와. 조금 있으면 오랜만에 풀의 긴 글을 보게 되겠군(^-^). 2010.02.12 12:59 신고
  • 프로필사진 NeoPool 피...피곤했나봐... 나 어제 급체해서 죽는 줄 알았당; 이제 다 나은 것 같기는 한데 나의 오장육부가 나에게 바란을 일으키니 그냥 벌러덩 누워있을 수 밖에 없더라능ㅠ 2010.02.13 09:44
  • 프로필사진 무한한 연습 저런(ㅠ_ㅠ). 그래서 지금은 괜찮은 거야? 게다가 부모님 뵈러 가야 하잖아? 아프지마삼!

    그나저나 네 댓글을 읽고, 아무 생각 없이 위의 포스트를 다시 읽었는데, 뜻이 잘 안 통하는 문장이 여럿 있어서 다시 고쳤다. 글 쓸 때 제정신이 아니었나봐(-_-).
    2010.02.13 15:15 신고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