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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완결까지 본 드라마 중에 [하나코와 앤花子とアン](2014)이 있다. 아동문학 작가이자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그린 게이블즈의 앤Anne of Green Gables](1908)[빨간 머리 앤赤毛のアン](1952. 앞으로는 소설 [빨간 머리 앤]과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 모두를 []으로 표기한다)으로 번역한 무라오카 하나코村岡花子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으로 NHK 연속 TV 소설NHK連続テレビ小説의 하나로 방영한 드라마이다(앞으로는 실존했던 인물은 무라오카 하나코로 드라마 캐릭터는 하나코로 표기한다). 연속 TV 소설은 각화 분량이 15분인 드라마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한 편씩 대략 6개월에 걸쳐 방영하는 드라마여서 일반적인 길이의 일본드라마로 환산하면 분량이 매우 많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전체분량이 156편이고 도중에 연이어 보지 못하기도 해서 완결까지 가는데 다른 연속 TV 소설보다 오래 걸린 드라마가 되었다. 2년에 걸쳐 보았으니 말이다.

 

아침에 방영하는 드라마이기도 해서 아사도라ドラ로 불리기도 하는 연속 TV 소설은 어떤 고난을 맞이하더라도 타락하지 않으며 꿈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인공은 연속 TV 소설이 아니더라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캐릭터이기는 하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작품을 바꾸어 가면서도 무려 1961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드라마 포맷에서 보게 되는 주인공 캐릭터이다보니 일본에서 연속 TV 소설 주인공은 아사도라 특유의 캐릭터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리갈하이リーガル・ハイ](2012~2014)에서도 승소를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변호사 코미카도 켄스케가 정의감으로 충만한 신입 변호사 마유즈미 마치코를 아침 드라마!”로 부르면서 정의는 특촬 히어로물과 [소년 점프]에만 있는 거라고 생각하도록!”이라며 일갈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이런 측면만 있다면 연속 TV 소설을 보려 하지는 않았을지 모르겠다. 주인공만 놓고본다면 모두 어딘가 비슷해 보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메이지 시대부터 현대 일본에 이르는 시기 중 특정한 시간대를 배경으로, 고난과 역경에 굴복하지 않고 크든 작든 자신의 (있을 곳, 있어야 할 곳, 자기자신답게 있을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장소로서의) 이바쇼居場所를 만들어가는 주인공을 드라마가 배경으로 하는 특정한 시대와의 맥락에서 긴 호흡으로 겹쳐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 이 드라마 시리즈 자체가 흥미로운 이미지의 집적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역사에 관한 관심이 아닌 팬심의 차원에서 기꺼이 연속 TV 소설의 시청자가 되어버린 사례가 없는 건 아니다. 미야자키 아오이가 주연한 [순정 반짝純情きらり](2006)이 그런 경우인데, 미야자키 아오이는 아오야마 신지의 영화 [유레카ユリイカ](2000)로 처음 알게 된 이래 관심을 갖게 된 배우였고 또한 [순정 반짝]의 원안이 된 작품이 내가 사랑하는 소설의 하나인 쓰시마 유코의 [불의 산](2008)이기도 해서 이 연속 TV 소설을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를 덧되더라도 나에게 있어 연속 TV 소설의 최대 매력은 역시 일본의 특정한 시대를 주인공 캐릭터와 함께 긴 호흡으로 보게 된다는 데 있다.

 

[하나코와 앤]도 같은 이유에서 보게 된 드라마이다. 타카하타 이사오의 [](1979)에서 출발해 넷플릭스의 [Anne with an “E”](2017-2018)에 이르는 작품을 보아온 나 같은 사람에게 무라오카 하나코의 일대기를 다룬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소재이지만(타카하타와 넷플릭스의 작품은 결이 매우 다른데 넷플릭스의 []은 타카하타의 애니메이션 이미지와 길항하거나 차라리 그 이미지들을 부수어놓는 방향으로 작용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그녀는 1893년에 태어나 1968년에 세상을 떠난 인물이기에 드라마를 본다면 메이지 후기부터 전후 쇼와까지의 역사적인 시기를 일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나코와 앤]은 각화가 15분이라고는 하지만 156화에 이르는 분량이기에 주인공이 살았던 시대의 풍경과 풍속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놓은 장면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이 있지만, 드라마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비교적 명확하다. [하나코와 앤]은 야마나시 현 고후甲府에서 하나코가 어린 시절의 마지막을 보내는 1900(메이지 33)부터 도쿄에서 []의 출판 기념회를 갖는 1952(쇼와 26)까지의 시기를 다룬다. 여기에서 하나코는 미래에 명망 있는 아동문학 작가이자 []을 번역하게 되는 무라오카 하나코이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 좌절하지 않고 꿈을 이루려 노력하는 일본의 앤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하나코와 앤]에서는 근현대 일본의 역동적이면서 파괴적인 역사 속에서 살아남아 자신의 이바쇼를 만들어가는 일본인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하나코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역사 속에서 살아남아 자신의 이바쇼를 만들어 간다는 것인가?

 

앞에서 나는 연속 TV 소설을 보는 이유를 주인공과 특정한 역사 시대를 긴 호흡으로 겹쳐볼 수 있다는 데서 찾았다. 그러나 해당 시대를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따라 연속 TV 소설을 보게 하는 이유가 반대로 드라마를 순탄하게 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여러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연속 TV 소설에 속한 드라마에서 나에게 특별히 그런 불편함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은 아시아ㆍ태평양전쟁과 그 여파에 관련된 작품들이다(앞으로 이어지는 글에서는 대동아전쟁이라는 전쟁명을 대체하여 전후에 정착된 전쟁명인 태평양전쟁 대신 아시아ㆍ태평양전쟁을 대동아전쟁을 대체하는 용어로 표기한다. 일본에 의해 아시아와 태평양에서 벌어진 대동아전쟁은 전후에 태평양전쟁-15년전쟁-아시아ㆍ태평양전쟁 등으로 구분해 불렀는데 어떤 전쟁명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포괄하는 시간대와 전쟁에 관한 시각이 달라지게 된다. 전쟁명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다음의 책들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요시다 유타카, [일본인의 전쟁관](이애숙, 하종문 옮김, 역사비평사, 2004. 한국어판은 1995년에 나온 일본어 초판을 번역한 것으로 일본에서는 역사교과서 문제와 연결된 여러 쟁점을 보완한 개정판이 2005년에 이와나미 현대문고岩波現代文庫의 하나로 출간되어 있다). 倉沢愛子杉原達成田龍一テッサモーリス-スズキ油井大三郎吉田裕 編集, [岩波講座 アジア太平洋戦争(1): なぜいまアジア太平洋戦争](岩波書店, 2005). Takashi FujitaniGeoffrey M. White and Lisa Yoneyama eds., [Perilous Memories: The AsiaPacific War(s)](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1)). 아시아ㆍ태평양전쟁과 그 여파라고 하면 1941년 이후의 일본 현대사를 모두 포괄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2016)[언내추럴](2018)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아시아ㆍ태평양전쟁과 그 여파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연속 TV 소설에서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아시아ㆍ태평양전쟁과 그 여파라는 자장에서 보게 되는 드라마들을 어렵지 않고 접할 수 있고 특히 전후 부흥이라는 문제가 작품을 달리하며 때때로 서사의 일부로 들어 있기도 해서(전쟁 시대를 직접 다루거나 그 시대에서 멀지 않은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뿐만 아니라 [아마짱あまちゃん](2013)처럼 1981년부터 1989년 그리고 2008년부터 2012년까지를 드라마의 시간대로 다루는 작품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아마짱]2011년에 도호쿠東北 지방과 태평양 해역에서 일어난 지진/쓰나미/원자력 발전 사고가 일어난 시기를 서사의 일부로 포함하고 있는데, 이 드라마는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도호쿠 지방과 태평양 해역에서 일어난 재난을 동일본 대진재東日本大震災로 뭉뚱그려 명명하면서 힘내라 일본!”頑張日本!과 같은 구호를 통해 제2의 전후 부흥을 이야기했던 동시대 일본의 분위기와 분리해서 보는 것이 불가능한 작품이었다), 오히려 전쟁의 시대를 떠올리지 않고 드라마를 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기도 하다.

 

애니메이션 비평가 김준양이 [이미지의 제국: 일본 열도 위의 애니메이션](2006)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아시아ㆍ태평양전쟁 시기에 벌어진 도쿄대공습과 원폭은 전후 일본에서 나타난 작품들에 일종의 원풍경原風景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는데, 압도적인 공중폭격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진 이 두 사건은 하늘에서 떨어진 폭탄으로 잿더미가 되어버린 폐허에서 살아남아 다시 공동의 장소를 이루어간다는 서사를 만드는 데 최적의 소재로 이용되고는 해왔다. 그리고 여기에 있어서는 [하나코와 앤]도 예외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나코와 앤]은 공습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집에서 []을 번역하고 있는 하나코와 도쿄를 공습하기 위해 밤하늘을 날아오는 미군 폭격기를 연이어 보여 주는 시공간, 정확히 1945415일의 도쿄라는 시공간에서 시작한다. 드라마는 소이탄이 쏟아져 내려와 불바다가 되어가는 가운데서도 번역 원고와 번역에 필요한 자료를 보듬고 아이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대피하는 하나코의 모습을 자세하게 보여준다. 소이탄이 지붕을 뚫고 들어와 번역 원고에 불이 옮겨 붙은 것을 보고 화급히 불을 끄는 하나코의 모습이라든지 대피를 해야하는 순간에도 []의 번역작업에 관한 자료 등을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라고 보듬는 모습 등을 [하나코와 앤]에서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코와 앤]은 연속 TV 소설에서 듣게 되는 특유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그러니까 드라마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전지적 시점에서 해설하는 내레이션으로 [하나코와 앤]의 주제의식이라고 할 만한 다음과 같은 음성을 들려준다. “이 씩씩한 아주머니는 무라오카 하나코라고 합니다. [빨간 머리 앤]을 최초로 일본어로 번역한 번역가입니다. 이것은 하나코와 앤이 만나 일본 국민들에게 꿈과 용기를 전하기까지의 이야기.”


 

그러고 나면 장면이 바뀌어 하나코의 어린 시절이 나오고 [하나코와 앤]은 여기서부터 그녀의 삶의 궤적을 시간순으로 하나하나 보여주며 드라마가 144화에 이르렀을 때 미군에게 폭격당할 위험에서도 []의 번역을 멈추지 않는 첫화에서 보았던 하나코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이야기 진행에 필요할 경우 []을 번역하는 하나코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이 장면들은 모두 전쟁 이전의 하나코의 삶을 설명하기 위한 도입부로 기능하는 것이어서 144화에서 보여주는 장면처럼 전후의 장면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머지않아 전쟁의 시간은 지나가고 전후가 도래하면 하나코와 함께 폭격에서도 살아남은 []1952년에 출간되면서 드라마는 끝이 나게 된다. 드라마의 마지막까지 하나코는 어른이 되어가면서도 맑은 꿈을 품고 있으며 전쟁의 시대를 통과하면서도 삶의 활력을 잃지 않는데, 아시아ㆍ태평양전쟁 시기에 번역하기 시작하여 전후에 []을 출간하는 하나코의 모습으로 이어지는 장면들은 하나코가 일본의 앤으로 이미지화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 드라마가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나오는 드라마(를 포함하는 여러 장르의 작품들)에서 아시아ㆍ태평양전쟁 시기를 직접 다루거나 작품에서 의미 있는 시간대로 나오는 경우, 전쟁의 시간은 지난 한 삶의 한가운데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부여잡으려 노력하고 폐허 이후에도 자신들의 장소를 만들어나가는 일본인의 모습을 강조하는 데 쓰이고는 했다. 그렇기에 전쟁은 침략과 피침략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난의 하나로 환원되거나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하기 어려운 운명이나 자연재해처럼 다루어지는고는 했다. 이때 고난은 (타자 없는) 우리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내부의 고난으로 표현되기에, 전쟁은 제국일본이라는 광역국가의 본국/내지의 외부로 나간 시선을 통해 침략의 이미지로 나타나기보다는 본국/내지라는 내부에서 미군에게 폭격당하는 일본인의 시선으로 나타나게 된다(오해가 없기를 바라는데 외부로 나간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카모토 기하치의 [독립우연대独立愚連隊](1959)[독립우연대 서쪽에独立愚連隊西](1960)처럼 본국/내지의 외부를 공간적인 배경으로 하는 영화더라도 사실상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 영화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전쟁 시기에 쓰인 대동아전쟁을 대신하여 전후에 사용된 태평양전쟁이라는 전쟁명은 널리 알려져있는 것처럼 일본의 패전 후에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GHQ에서 일본인의 전쟁관을 교정하기 위해 정착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 전쟁명은 아시아가 드러나지 않는 특정한 방향으로 전쟁관을 교정하기 위해 사용된 전쟁 사관이었다. 태평양전쟁이라는 전쟁명에 담겨 있는 전쟁 사관의 목적은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일본이 패전했다는 것을 기본 골격으로, 한편으로는 전쟁 시기 중국의 항일전쟁을 포함해 아시아에서 일어났던 항일투쟁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한 최저의 역사적인 기억으로 축소하는 것과 동시에 조선과 타이완에 관한 식민지 지배 문제는 반성의 가시권에서 제외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 책임의 문제를 군부에 집중시키는 방식을 통해 천황이 짊어져야할 책임을 면책시키고 민중들에게는 군부에 속아서 전쟁에 가담했다는 서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태평양전쟁 사관은 전쟁에서 미군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아시아의 역할과 피해는 축소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기에, 아시아를 전쟁터로 만들어버린 일본의 입장에서는 대동아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전쟁의 기억을 침략이라는 문제로부터 분리하기에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역사관이었다. 그 결과 태평양전쟁 사관은 아시아에 관한 책임의 문제를 깊이 고려하면서 전쟁에 관한 기억을 비판적으로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미군의 공중폭격과 원폭투하를 강조하는 가운데 이른바 피해자의식을 내면화하면서 전쟁에 관한 기억을 상상적으로 대면하는 태도를 낳게 된다.

 

[하나코와 앤]에는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미야모토 렌코와 미야모토 류이치 부부처럼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도 등장하며 전쟁이 끝나자 패전이라고 슬퍼하기보다는 전쟁이 끝났음을 다행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또한 하나코가 전쟁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여 줄 때도 전쟁이기에 국민의 의무를 수행하기는 하지만 마음 속 깊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며 자신이 맡고 있는 라디오 방송에서 아이들에게 전쟁 뉴스를 계속해서 전해야하는 상황이 되자 방송을 그만두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시 말해 [하나코와 앤]에는 누군가는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애국국민으로 칭송받는 반면 누군가는 의무를 저버린 비국민으로 비난 받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전쟁에 관하여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나타내려는 장면들이 없지는 않다. 그럼에도 드라마에서 이 차이는 다시는 국민으로 합해질 수 없을 정도의 근본적인 적대로 표현되지 않으며, 다같은 국민임에도 전쟁이기에 어쩔 수 없이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방향으로 이미지화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무엇보다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전쟁을 두고 서로 간에 보였던 차이는 순식간에 무화되어 버린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미군의 공중폭격은 애국국민과 비국민을 가리지 않고 폭탄이 떨어지는 사태이기에 어떤 국민이든 지상에 있는 사람들은 죽을 수 있는 가능성에 무작위로 노출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거쳐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이후 누구랄 것도 없이 폐허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일본 국민으로 전환된다. 말하자면 이들 모두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미군의 공중폭격이라는 재앙에서 살아남은 전쟁의 피해자들이 되는 셈이다.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수히 많은 폭탄이 떨어지는 상황은 말 그대로 지옥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서사화 하는 방식의 역사가 지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동일화하는 방향으로만 전개되었던 것이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알렉산더 클루게가 [194548일 할버슈타트 공중폭격Der Luftangriff auf Halberstadt am 8. April 1945](1977~2000)이라는 표제로 작성한 단편들은 공중폭격이라는 사건을 자기연민의 자양분으로 삼지 않고 비판적 탐구를 위한 역사적 자원으로 다루는 존경받을 만한 태도를 보여 주는 작품들이다. 할버슈타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으로 80% 이상이 파괴된 도시였다. 클루게는 이 도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할버슈타트 폭격을 체험하게 되는데, [194548일 할버슈타트 공중폭격]은 폭격에 관한 체험과 픽션을 결합하여 ([이력서들](2012)과 같은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역사를 탐구한 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클루게는, 할버슈타트 공중폭격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지만, [아래로부터의 전략][위로부터의 전략]이라는 단편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폭격을 피해 방공호로 대피하는 사람들에게 같은 독일 국민이라는 이유로 그들과 합일해버리는 선택지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오히려 그는 폭격을 당하는 사람들이 왜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가를 무서울 정도로 지성적이면서도 세심하게 분석하며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잘못된 희망을 품은 채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려 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다른 역사는 어떻게 가능한가를 탐구하는데 필요한 감정/감각Gefühl을 포착하려는 작업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하나코와 앤]은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공중폭격이라는 사태를 클루게의 작품과는 정반대로 보여 주고 있다. 공중폭격으로 불바다가 되어버린 상황에서도 []의 번역 자료를 보듬고 대피하는 하나코의 모습과 이것은 하나코와 앤이 만나 일본 국민들에게 꿈과 용기를 전하기까지의 이야기라는 내레이션을 첫화에 배치한 다음, 기어이 시작의 장면으로 다시 돌아와 []의 출판 기념회로 마무리하는 드라마에서 일본 국민들에게 꿈과 용기를 전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나코와 앤]에서 보여준 하나코와 앤이 만나 일본 국민들에게 전해 주었다는 꿈과 용기는 어떤 역사적 상상에 토대하여 어떤 미래를 바라는 꿈과 용기였던 것일까? 물론 나는 전후 일본에서 꿈과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아시아ㆍ태평양전쟁은 분명 침략 전쟁이었지만, 침략 국가의 성원 모두가 절멸당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꿈과 용기는 필요하며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이야기도 당연히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꿈과 용기가 필요하게 된 원인이 타자에게 극한의 고통을 안겨준 전쟁으로 연결되는 것일 때, 그렇게 되어버린 원인을 탐구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채 꿈과 용기를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기만적인 자기위안으로만 남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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