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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지금 내 휴대폰에 있는 음원 중에는 지휘자 에리히 라인스도르프Erich Leinsdorf와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Boston Symphony Orchestra[고별 연주회](RCA, 1969) 앨범이 들어있다. 샤를 뮌슈의 후임으로 1962년부터 1969년까지 보스턴 심포니의 음악 감독을 맡았던 라인스도르프는, 7년 동안의 보스턴 심포니 활동을 마감하는 고별 연주회를 1969418일과 19일 이틀에 걸쳐 갖게 된다. 이 연주회에서 라인스도르프와 보스턴 심포니는 쇤베르크의 [바르샤바의 생존자A Survivor from Warsaw](1947. 앞으로는 [생존자]로 통칭한다)와 베토벤의 [교향곡 9](1824. 앞으로는 [9]으로 통칭한다)을 연주하는데, 이 음악들은 연주회 직후인 421일부터 23일까지 보스턴 심포니 홀에서 녹음된 후 앨범으로 출시되었다(당시의 녹음 상황에 따른다면 [고별 연주회] 앨범이라기보다는 고별 연주회 프로그램에 기반 한 앨범으로 표기하는 것이 정확하겠지만, 여기에서는 편의상 [고별 연주회]로 통칭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음원은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쳐 2000년에 CD로 재출시된 앨범에서 추출한 것이다.

 

이 앨범은 내가 처음으로 들은 라인스도르프와 보스턴 심포니의 연주이다. 이름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이지만 2010년이 넘어 [고별 연주회] 앨범을 알게 되었으니 이 둘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연주를 꽤 늦게 들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별 연주회] 앨범을 언제 듣게 되었는가와는 관계없이, 나는 때때로 이 연주를 찾아 듣는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에 각별한 애정이 있어서는 아니다. 레너드 번스타인과 연주한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DG, 1977)이나 오자와 세이지와 크리스티안 짐머만과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1 & 2](DG, 2003) 같은 앨범을 제외하면, 오히려 안드리스 넬슨스가 2013년부터 음악 감독으로 취임한 이후에 나오고 있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사이클 앨범(DG, 2015-)으로 비로소 보스턴 심포니의 사운드를 일정한 간격으로 접하고 있다. 그렇다고 저 앨범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는 곡이어서도 아닌데, 베토벤과 쇤베르크는 클래식 음악사에서 압도적인 위치에 있는 작곡가들이기에 그들의 음악을 듣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기도 하다.

 

사실 [고별 연주회] 앨범을 알게 되었을 때만 해도, 나는 이 앨범을 때때로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 앨범에 수록된 음악들은 다른 음악가들의 연주로 이미 들은 것이었고 앨범으로도 적지 않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앨범을 듣고 나서 불현듯 깨달은 것은, 라인스도르프와 보스턴 심포니의 [고별 연주회] 앨범을 듣기 전까지 쇤베르크의 [생존자]와 베토벤의 [9]을 단 한 번도 연이어서 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곡의 순서가, 누군가에게는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한 감상법일 수 있고(어쨌든 내가 들은 CD로 출시되기 31년 전에 LP로 출시된 앨범이다) 누군가에게는 클래식 음악계의 변함없는 관습에 따른 음악 배치일 수 있지만(클래식 음악계에서 어떤 작품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가와 연주 시간의 측면 모두 해당한다), 나에게는 2010년경에 처음 들은 이래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해서 앨범을 찾게 되는 이유이다. 쇤베르크의 [생존자]로부터 베토벤의 [9]으로 이어지는 [고별 연주회] 앨범의 구성은 이 음악들에서 느낄 수 있는 음악적 효과를 특정한 역사적 상상으로 연결한다. 그렇기에 [고별 연주회] 앨범을 듣는다는 것은 일정한 역사적 자장을 느껴가며 음악을 듣는 것이기도 한데, 이러한 효과 때문에 나는 이 앨범을 찾아 듣고는 한다.

 

ㅡ 서구 클래식 음악에 관심 있는 사람이 쇤베르크에 관한 글을 읽는다고 할 때, 그에 관해 접할 가능성이 가장 큰 동시대 이미지는 혁신가와 전통파괴자로서의 쇤베르크일 것이다. 이를테면 음악비평가 알렉스 로스의 [나머지는 소음이다](김병화 옮김, 21세기북스, 2010)에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 “바그너, 슈트라우스, 말러는 모두 자신들의 새로운 소리와 공통적 화음의 거대한 발언 간의 균형을 맞추었다. 불협화음과 협화음이 서로를 보강해주는 긴장감 속에서 공존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드뷔시는 안개 같은 화성적 지형에 기묘한 선율의 형체를 심어놓았다. 스크리아빈은 화성적으로 가장 극단으로 치달은 후기 피아노소나타에서도 조성적 중심성의 느낌을 유지했다. 돌아갈 길이 없다고 주장한 것은 쇤베르크였다. 사실 그는 조성이 죽었다고, 혹은 베베른이 나중에 말했듯이, “우리가 그 목줄기를 부러뜨렸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쇤베르크의 글을 읽어보면 무조 음악과 12음 음악의 새로움을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그의 음악이 독일음악의 전통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했음을 알게 된다. 쇤베르크는 자신의 음악을 역사적인 과정의 산물로 이야기하고는 했는데, 이럴 때 그는 독일(어권)의 위대한 작곡가들이 이룩해 놓은 독일음악의 연결 선상에 자신의 음악을 자리매김하고는 했다. 이를테면, 바흐-모차르트-베토벤-브람스-바그너-말러-R. 슈트라우스 등을 나의 스승이라고 표현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음악에서 들을 수 있는 독창적인 사운드는 저 작곡가들의 음악을 모방하고 연구한 후에 새로운 음악으로 확장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전 시대의 음악들에서 조성 음악의 질서가 붕괴되고 있었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무조 음악의 정당성을 확보하거나, 시대의 변화가 새로운 음악을 요구한다면서도 그 새로움을 독일음악의 발전 선상에서 설명함으로써 12음 음악을 음악사에서의 필연적인 산물로 주장하고는 했던 것이다(쇤베르크 음악에 관한 주요 연구 경향의 하나는 보수적 모더니스트로서의 쇤베르크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1924년에 쇤베르크의 50세 생일을 맞아 그의 제자인 아이슬러가 고전의 대가처럼 풍만함과 완성도를 가진 음악을 위해서 새로운 음악 재료를 만들었고, 보수주의자로 머물기 위해 혁명을 일으킬 정도로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는 더할 수 없이 멋진 표현으로 압축한 바 있지만, 아이슬러의 이러한 표현은 단순한 수사가 아닌 쇤베르크 음악의 핵심을 꿰뚫는 말로 기억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는 이야기할 여유가 없지만 보수적 모더니스트로서의 쇤베르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쇤베르크의 논문 선집인 [스타일과 아이디어Style and Idea, Selected Writings](translated by Leo Black,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4)에 수록된 글과 음악학자 김경화의 쇤베르크의 혁신적 스타일과 전통적 패러다임: 기초 악상을 중심으로(한양대학교 대학원 음악학과 박사학위논문, 2011)와 이경분의 [쇤베르크와 독일음악’](민족음악학회, [음악과 민족], 2001)을 참조할 수 있다. 아이슬러의 말은 이경분의 논문에서 가져왔다). 물론 이런 설명 방식은, 청중들로부터 미쳤다는 비아냥을 듣거나 독일음악의 전통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파괴만 일삼는 작곡가로 비판받기도 했던 쇤베르크였기에 자신의 음악이 미치광이 작곡가의 광기 어린 산물이 아닌 음악사적인 논리로 도출 가능한 산물로 방어할 필요와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쇤베르크에게 무조 음악과 12음 음악이 독일음악의 전통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그에게는 충분히 설명 가능한 사실에 속하는 것이었다.

 

1933년에 나치의 압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후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도 독일로 돌아가지 못하던 쇤베르크가 1947년에 작곡한 [생존자]에는 저 두 개의 기법이 모두 쓰이고 있다. [생존자]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바르샤바 게토에 있던 유태인들이 독일군에게 (죽음에 이르는) 폭력을 당한 뒤에 가스실로 끌려가기 직전에 셰마 이스라엘을 부르기까지의 상황을 영어와 독일어가 혼합된 생존자의 내레이션으로 듣게 되는 부분과 가스실로 끌려갈 한 무리의 유태인 남성들이 히브리어로 셰마 이스라엘을 부르는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나는 블로그에 쇤베르크 감상력/에 관한 개인적인 경험과 내레이션/가사를 중심으로 쇤베르크의 [생존자]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생존자]의 내레이션/가사에 관한 좀더 구체적인 설명을 생략하고 블로그에 쓴 글로 대체하려 한다), 쇤베르크는 이 곡의 전반부는 무조 음악으로 후반부는 12음 음악으로 작곡했다. 이 곡은 연주 시간이 6~7분 정도지만 상당한 음악적 밀도로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다룬다. 제목은 바르샤바의 생존자이지만 생존자가 증언하는 내용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로 들릴 정도로 집단/학살수용소의 풍경을 상상하게 만들고, 트럼펫의 날카로운 팡파르로 시작해 다양한 사운드로 가세하는 오케스트라는 바르샤바의 생존자가 속한 세계가 파국에 이르렀음을 음악으로 들려준다. 아마도 [기대](1909)[피아노 모음곡](1921~1923) 등을 작곡하던 시기의 쇤베르크는, 독일음악의 전통에서 정당화하려 했으며 앞으로 100년 동안은 독일음악의 우위를 보장할 것이라 이야기했던 바로 그 음악기법을 사용하여 독일 제3제국의 지배 아래 벌어진 유태인 학살에 관한 음악을 작곡할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의 [생존자]에서, 무조 음악으로 작곡된 부분에서는 독일군에게 구타당해 죽음에 이르고 12음 음악으로 작곡된 부분에서는 가스실로 끌려가기 직전에 셰마 이스라엘을 부르는, 학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태인들에 관한 음악적 형상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ㅡ 독일 제3제국 시기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생존자]를 통과한 다음, [고별 연주회] 앨범에서 연이어 듣게 되는 음악이 베토벤의 [9]이다. 일반적으로 베토벤의 [9]고통을 통한 환희내지는 고난과 역경을 넘어 환희의 세계로라는 베토벤 음악의 이디엄이 ([교향곡 5]과 함께) 가장 탁월하고 깊이 있게 표현된 곡으로 이야기되어왔다. 그중에서도 환희의 송가가 들어있는 4악장은 긴 시간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아 온 클래식 음악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9]4악장에서 듣게 되는 환희의 송가가 청자에게 그토록 호소력 있게 들리는 이유의 하나는 4악장만큼이나 인상적인 1악장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생존자] 다음으로 1악장을 연이어 들을 수 있는 [고별 연주회] 앨범의 배치는 쇤베르크로부터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연결에 특정한 역사적 상상을 불어넣는다.

 

[9]1악장은 독특한 방식으로 시작한다. [9]D단조로 작곡되었음에도, 음악이 시작하면 1악장의 시작 부분은 사실상 장/단조를 판별할 수 없는 음들의 구성으로 진행되기에, 이 음악의 제시부에 관한 첫인상은 신비로우면서도 불안하며 중심을 알 수 없는 심연에서 음악이 시작된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그러나 [9]D단조라는 조성으로 구성된 이상, /단조를 판별하기 어려운 도입부가 지나고 나면 음들의 질서를 ()구축하고 조성을 확립하기 위해 고난과 역경에 격렬하게 맞서는 음악으로서의 1악장을 듣게 된다. 말하자면, 베토벤의 [9]은 주제와 조성이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쟁취해야 하는 것으로 들리게 하는 효과가 있는데,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심연으로부터 시작하여 음들의 투쟁으로 진행되는 1악장이다.

 

이러한 1악장이 [생존자]와 접속하는 순간, [9]파국 이후의 음악으로 들릴 수 있게 된다. 조성음악의 한계를 돌파하여 독일음악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 보일 것이라 기대했던 쇤베르크의 새로운 음악이, [생존자]에서는 그것이 탄생했던 세계 자체가 전쟁과 학살로 파국에 이르렀음을 들려주는 음악이 되어버렸다. 이제 어떤 음악을 들을 수 있을까? 이때 베토벤 [9]1악장이 들려온다. /단조를 판별하기 어려운 1악장의 도입부가 [생존자]와 연결됨으로써 [9]은 무너져 내린 세계의 폐허로부터 들려오는 음악이 되고, 음악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과정으로 그려지는 음들의 격투는 파국 이후의 재건을 향한 유토피아 열망의 여정이 된다. 그리고 이 여정의 끝에서 청자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듣게 된다. “- 벗들이여, 이런 선율이 아니오! 좀 더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르지 않겠는가.”

 

앞에서 나는 [생존자]를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이 음악의 전반부는 영어와 독일어가 혼합된 생존자의 내레이션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여기에는 약간의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쇤베르크는 어떤 언어로 생존자가 내레이션을 하는가에 따라 두 개의 언어가 다른 기능을 갖게 해놓았다. 생존자가 영어로 내레이션을 할 때 이 언어는 살아 돌아온 자의 증언의 언어가 되지만, 생존자가 독일어로 내레이션을 할 때 이 언어는 독일군이라는 학살자의 언어가 된다. 그래서 [생존자]에서 발음의 예각을 살려 내레이션을 하게 되면 독일어라는 살인무기로 유태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언어로 독일어가 들리는 효과가 발휘된다. 그런데 베토벤 [9]4악장에 이르러 - 벗들이여, 이런 선율이 아니오! 좀 더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르지 않겠는가라는 노래가 들려오면, ‘독일어라는 살인무기로 기능했던 언어는 기쁨에 찬 노래가 아닌 선율을 향해 중단을 선언하는 이제 그만으로서의 언어가 되고, 이어서 단절 이후의 새로운 기쁨을 불러들여 환희의 송가를 부르는 인류애의 언어로 전환된다. 쇤베르크의 [생존자]로부터 베토벤 [9]으로의 이어짐은 폐허로부터 새로운 공동성으로 나아가는 음악적 연결이 된다.

 

ㅡ 파국 이후, 새로운 세계를 향한 유토피아 열망을 이어주는 음악 경로로 쇤베르크와 베토벤을 듣는다는 것은 서구 클래식 음악 전통에서 생각해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선택의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라인스도르프와 보스턴 심포니의 [고별 연주회] 앨범 이전에는 같은 구성으로 음반화 된 사례를 찾을 수 없고 그 이후에는 지휘자 미하엘 길렌Michael Gielen과 프랑크푸르트 오페라극장 무제움 오케스트라Frankfurter Opern- und Museumsorchester의 라이브 연주를 녹음한 앨범이 있을 뿐이다(EMI Electrola, 1987). 그러나 역사적 상상과 연결하여 음악을 들려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매력적이고 각각의 작곡가가 갖는 음악사적인 위치라는 측면에서도 매력적인 구성이기에, 앨범에만 한정하지 않는다면 같은 성격의 프로그램이나 비슷한 계열의 다른 시도를 찾아보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2017년에 있었던 앨런 길버트와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회이다. 길버트와 뉴욕 필은 쇤베르크의 [생존자]와 베토벤의 [9]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으로 다섯 번의 연주회를 열었는데, 프로그램 북에 따르면 [생존자][9] 사이에 인터미션이 없어서 [고별 연주회] 앨범처럼 연이어 연주하게 되어 있다. 에사-페카 살로넨과 LA 필하모닉도 같은 프로그램을 2000년에 올린 적이 있는데, 이 연주회에서도 두 곡 사이에 인터미션이 없이 연주를 이어가지 않았을까 한다(이 연주회는 프로그램 북을 구해 볼 수 없어서 곡 사이의 연결이 어땠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쇤베르크와 베토벤은 아니지만 프로그램의 테마와 연주방식에서 [고별 연주회] 앨범을 떠오르게 하는 것으로는 2010년에 있었던 사이먼 래틀과 베를리너 필하모니커Berliner Philharmoniker의 연주회를 꼽을 수 있다. 이 연주회에서 래틀은 [생존자]와 말러의 [교향곡 2부활’](1894)을 한 프로그램으로 구성했고 이때 역시 인터미션 없이 쇤베르크에서 말러로 연이어 들을 수 있게 연주했다(이 연주회는 유료이기는 하지만 베를린 필 홈페이지의 디지털 콘서트홀에서 제공하는 영상으로 관람할 수 있다).

 

[고별 연주회] 앨범을 포함하여 위에 열거한 연주회들은 (래틀과 베를린 필이 베토벤 대신 말러를 연주하기는 하지만)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전반부는 학살의 역사를 배치하고 후반부는 학살 이후 인류애의 재건을 향한 유토피아 열망을 배치해서 파국으로부터 새로운 공동성으로 나아가는 음악적 경로를 선형적으로 들을 수 있게 해놓았다는 것이다. 음악사적으로는 베토벤(과 말러)가 먼저이고 쇤베르크가 나중이지만 무대에 올리려는 음악이 [9]([‘부활’])[생존자]일 때 쇤베르크로 마무리되는 무대를 찾기는 아마도 매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9]([‘부활’]) 이후에 [생존자]가 온다는 것은 유토피아 열망을 담은 낙관적인 서사로 음악을 마무리할 가능성이 사라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만 [생존자][9]은 연주되어 왔던 것일까? [9]으로 시작해서 [생존자]로 마무리되는 방식은 아니지만, 베토벤과 쇤베르크의 음악을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연주회에 올린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 연주회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글을 끝맺고 싶다.

 

1978년부터 1987년까지 프랑크푸르트 오페라의 음악 총감독을 지낸 길렌은 해방적 인류애를 향하여 선형적으로 진행되는 서사를 매개하는 음악으로 쇤베르크와 베토벤을 연주하는 것에 관해 조금 더 복합적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앞에서 1987년에 있었던 연주회를 이야기했지만, 사실 길렌은 1986년에 신시내티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연주회에서 [생존자][9]을 올린 적이 있다. 이때 길렌이 쓴 프로그램 해설이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는데, 이 글에서 길렌이 [생존자][9]을 같은 프로그램으로 올리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을 보면 연주회에서는 선형적으로 진행된다 하더라도 음악을 듣는 청자는 해방과 억압의 문제를 복합적으로 사고하면서 듣기를 요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거의 길렌 판본의 아도르노를 읽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실제로 그는 1986년에 아도르노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특별하게 이야기하려는 것은 저 두 연주회가 아니라, 1978년에 프랑크푸르트 무제움 협회Frankfurter Museumsgesellschaft에서 있었던 프랑크푸르트 오페라극장 무제움 오케스트라와의 연주회이다(이 오케스트라는 무제움 협회에서 운영하는 오케스트라이면서 동시에 프랑크푸르크 오페라에 소속된 오케스트라이기도 하다).

 


길렌은 프랑크푸르트에 있던 10년을 길렌 시대”Ära Gielen로 각인시킬 정도로 창의적인 음악 프로그램을 올리고는 했는데,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1978년에 있었던 연주회도 그렇게 기억되는 공연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 연주회야말로 86년의 신시내티와 87년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있었던 연주회 (아이디어)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연주회에서도 쇤베르크의 [생존자]와 베토벤의 [9]을 무대에 올렸다. 그런데 (글과 함께 올리는) 당시에 배포된 프로그램 북 이미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통상적인 방식과는 전혀 다른 공연으로 연주가 진행되었다. [9]3악장과 4악장을 따로 떼어낸 후 이 두 악장 사이에 [생존자]를 집어넣어 연주하는 것을 전반부 공연으로 배치하고 인터미션을 가진 후의 후반부 공연에서는 [9] 전곡을 연주하는, 어떻게 보면 괴이하게 보이는 연주회를 진행한 것이다.

 

음악학자 조이 H. 칼리코Joy H. Calico[전후 유럽에서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바르샤바의 생존자]Arnold Schoenberg's A Survivor from Warsaw in Postwar Europe](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4)[서문]에서 길렌의 시도를 베토벤의 음악 사이에 쐐기를 박아넣듯이 [생존자]를 박아넣었다고 쓰고 있는데, 나는 이러한 표현이 단순한 비유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베토벤의 [9] 안에 쇤베르크의 [생존자]를 박아넣었다는 표현에서 즉각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길렌의 시도에서 쇤베르크는 베토벤의 앞에 배치되어 있지 않으며 그렇다고 뒤에 배치되어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9] 3악장과 4악장 사이에 [생존자]가 있기에, ‘환희의 송가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존자]를 거쳐야 한다. [생존자]를 지나간 역사로 만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파국으로 끝내는 것도 아닌, 인류애를 노래하는 음악의 구성적인 사운드로 [생존자]라는 음악을 박아넣었기에 [9]에서 [생존자]를 뽑아낸다는 것 자체가 역사를 지워버리는 곤혹스러운 문제가 되어 버린다.

 

여기에 더해, 프로그램 북에 근거해 본다면 [생존자] 다음에 오는 4악장은 극히 일부만 연주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4악장의 악상을 모두 표기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악상이 이어짐을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줄여서 표기하지도 않았으며 “Rezitativ des Baritone-Solos aus dem 4. Satz”라고만 표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연주회의 전반부에서 청중이 들을 수 있는 [9]4악장은 바리톤이 레치타티보로 부르는 - 벗들이여, 이런 선율이 아니오! 좀 더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르지 않겠는가가 전부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랬다면 [생존자]와 바리톤의 레치타티보 이후에 환희의 송가는 결코 울리지 않았을 것이다(널리 알려진 것처럼, [9] 4악장의 환희의 송가는 실러의 텍스트를 저본으로 삼았지만 환희의 송가로 돌입하기 직전의 레치타티보는 베토벤이 작사했다). 연주회의 전반부에서 기쁨에 찬 노래는 도래하지 않은 공백으로 남는다. 이러한 배치는 [9]을 듣고자 하는 청중들의 일반적인 기대를 철저하게 배신하는 것이다. 본래대로라면 3악장 다음에 팡파르가 들리고 환희의 송가로 넘어가는 사운드를 기다리게 되지만, 길렌의 시도에서는 환희의 송가’ 이전에 팡파르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생존자]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가 들려온다. 해방과 인류애의 사운드를 기대하는 순간에 억압과 학살의 사운드가 들어서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길렌의 시도는 해방과 학살이 뒤엉킨 근대의 역사를 거대한 음악적 몽타주로 연주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실제로 프랑크푸르트에서 길렌이 시도했던 일련의 음악회를 가리켜 몽타주-음악회”Montage-Konzerte로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 다음에, 청중들은 베토벤 [9]의 전체를 들을 수 있게 되지만, 이 후반부 연주는 전반부의 연주를 떠올리며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생각에, 아마도 [9]의 팡파르와 [생존자]의 팡파르를 동시에 울려 들을 수 있게 하는 방법이 있었다면 길렌은 그런 공연을 계획했을 것이다(다른 작곡가의 음악이기는 하지만 길렌이 1995년에 베른트 알로이스 침머만의 [젊은 시인을 위한 레퀴엠Requiem für einen jungen Dichter](1969)의 연주를 추진하고 앨범화 했던 데에는 이 음악의 마지막 부분인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Dona nobis pacem]에서 베토벤 [9]4악장을 분절하면서 그 사이에 세계의 사운드를 쏟아붓는 치머만의 방식에 이끌렸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한 클래식 음악회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는, 절멸의 음악과 인류애의 음악을 나누어 들려준 다음, 이 두 음악이 같은 역사-공간에 있었던 것이 근대의 역사였음을 음악적으로 느껴보는 시도를 하는 것이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길렌의 시도에서는, 파국을 가능케 했던 역사적인 문제들을 숙고하지 않는 한 고난과 역경을 넘어 환희의 세계로진입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환희의 송가가 진정으로 성립할 수 있으려면 [9]에 쐐기처럼 박혀있는 [생존자]의 목소리를 같이 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덧붙임] 본문에서 이야기한 “[생존자]-[9]” 순이 아니라 “[9]-[생존자]” 순이라는 음악 배치는 [고별 연주회] 앨범을 들을 때마다 개인적으로 하던 생각이었다. 음악적 효과에 관한 궁금함도 있었지만 역사적인 맥락을 짚어가며 듣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있기도 했었다. 그런데 2014년에 이른바 스데롯 시네마”Sderot Cineam라고 불린, 이스라엘군에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가 폭격당하는 것을 즐겁게 관람하는 이스라엘인들의 모습을 보고는, 음악 배치의 순서를 상상해 보는 시간이 의미 없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여기에 또 다른 고민이 더해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에드워드 사이드가 [권력 정치 문화](최형석 옮김, 마티, 2012)에서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인에게 절멸적인 폭력을 당하는 상황을 가리켜 희생자들의 희생자가 되어버렸다고 이야기한 맥락에서 [생존자][9]을 듣는 방식은 어떤 것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남고는 했다. 쇤베르크가 [생존자]를 작곡한 바로 다음 해인 1948년에 다비드 벤구리온과 이스라엘 건국 세력이 팔레스타인에서 저지른 팔레스타인인 민족학살(역사학자 일란 파페는 [팔레스타인 비극사: 1948, 이스라엘의 탄생과 종족 청소](유강은 옮김, 열린책들, 2017)에서 이 역사를 치밀하게 추적하고 복원한다)이후, 중단되기는커녕 오히려 다양한 방법으로 지금까지 학살이 자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생존자][9]을 어떤 방식으로 들을 수 있을까? 다니엘 바렌보임과 사이드가 창단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West-Eastern Divan Orchestra가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 전집](DECCA, 2012)만인을 위한 베토벤”Beethoven For All이라는 타이틀로 나와 있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바렌보임과 사이드의 노력 그리고 이들을 향한 나의 애정과는 별개로) 이러한 시도가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들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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